25) 조선조 말의 민란들

조선조 말이 다가오면서 나라는 패색이 짙어져 중앙에서는 국기가 문란하고, 지방에서는 썩은 관리들의 횡령과 착취가 기승을 부렸다. 이 무렵이 되면서 눈을 뜨기 시작한 민중들이 부패한 세력에 반기를 드는 민란이 잦아졌다.

철종 13년(1862) 2월에 부임한 임헌대(任憲大) 목사는 토호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부역과 목장 세를 면제해주고 그 부담을 불쌍한 농민들에게서 부과했다. 이에 같은 해 10월 서광리(西廣里) 사람 강제검(姜悌儉)과 제주목 김흥채(金興采) 등이 시정해 주기를 요구하고 나섰으니, 많은 호응 자를 얻어 10월 18일에는 제주성을 부수고 관청으로 몰려들었다.

이 사건으로 임 목사와 판관 구원조(具源祚)가 파직되고, 목사는 유배를 갔다.

고종 27년(1890) 12월에는 역시 탐관오리에 항거하여 하귀리(下貴里) 김지(金志)가 관아를 점거한 사건이 있었으며, 그 이듬해에도 정의 사람 이완평(李完平) 등이 탐관오리를 성토하는 사건이 있었다.

광무(光武) 2년(1898) 2월 역시 전남 동복군 사람 방성칠(房星七)이 남학당(南學黨)임을 자처하고, 광평리에서 군중을 모아 제주목 관아에 돌입했다. 이 사건 역시 최고의 목표는 탐관오리를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1년에 일어난 신축(辛丑) 성교란(聖敎亂)이라고도 하고, 이재수(李在守) 난, 혹은 제주항쟁이라고도 하는 민란은 물론 가렴주구에 대한 항거도 있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반감도 없지 않았다.

지난 2003년 11월 7일 저녁 제주시 열린정보센터 대회의실에서 '화해와 기념'이라는 주제의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제주항쟁기념사업회와 천주교 제주교구가 공동으로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1년 변방의 섬 제주에서는 제주도민과 천주교인 사이에 커다란 갈등이 빚어졌다. '신축년항쟁' '이재수란' '신축교안' 등으로 불리는 이 역사적 사건은 20세기 벽두에 한국 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외래문화와 토착전통문화, 외세와 대한제국, 국가와 지방 사이 충돌로 일어났다.(중략)

우리는 100년 전 이 땅 제주에서 일어난 일을 제주 공동체 모두의 경험과 해결 과제로 받아드리고자 한다. 천주교 측은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과거의 잘못을 사과한다.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는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사과한다. 이에 우리는 제주의 후손들로서 지난날의 아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용서하며 화해를 구하고자 한다.

우리는 향후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적극 노력한다."
민란이 일어난 지 실로 100년이 넘어서야 이 같은 합의를 이뤄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그때 제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천주교가 정식으로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것은 1899년 5월이다. 프랑스 신부 배가록과 김원영(金元永)이 처음 파견된 신부였다. 그러나 1900년 역시 프랑스 신부 구마슬이 오고, 1901년에는 문제만 신부가 오게 된다. 당시 조정은 프랑스에 기대있던 때라 신부들은 애초부터 권세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여기에 세금을 받는 봉세관들이 합세하고, 귀양와 있던 유배인들도 합류했다. 교인들은 세도를 믿고 도민들을 린치하고, 그런 가운데 1901년 1월 정의교당에서 지방 사람 오신락(吳信洛) 등이 치사한 사건이 발생한다.

교인들이 이 같이 세력을 부리자 대정의 유생들 사이에 상무사(商務社)가 조직되고, 교폐를 호소하기 위해 오대현(吳大鉉)을 장두로 제주목을 향해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 일행 6명은 지금 한림인 명월진에서 미리 알고 마주 간 천주교인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이에 분개한 상무사들은 대정으로 돌아가 이재수와 강우백(姜遇伯)을 장두로 동서진으로 나눠 천주교인 토벌에 나서게 되니 이것이 곧 제주항쟁이다. 민란군들은 5월 28일 제주성을 함락하고, 붙잡은 교인 수백 명을 관덕정 마당에서 공개리에 죽이니 큰 비극이었다.

연락을 받은 프랑스 함대와 정부군이 6월 1일에 오고, 마침내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장두는 서울로 끌려가 형식적인 재판 끝에 처형됐다.

이들 항쟁에 앞장섰던 삼의사(三義士)의 비가 지금도 대정성 동문밖에 세워져 지나는 사람들 발길을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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