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잇따라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있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케냐의 여성 환경운동가 왕가리 마타이(64)가 선정되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는 엘프리데 옐리네크(58)가 선정되는 등등. 눈여겨볼 점은 이 같이 수상자로 선정된 인물들의 공통점이다.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하나같이 비장애인이라는 데 있다.

▲ 우주의 탄생을 밝힌 현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물건을 잡지도,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근육병 장애인이다.
장애의 범주를 넓게 잡으면 수상자로 선정된 인물 중에 장애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사회 공포증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 앞에 나서기가 두렵기에.

또한 정신질환자가 노벨 경제학상을 받기도 했다. 심각한 정신 분열증을 앓은 병력을 가진 존 내쉬가 바로 그. <뷰티풀마인드>라는 제목의 책과 영화로 한국에도 유명한 존 내쉬는 자타가 공인한 정신질환자였으며, 노벨상 수상식 공식 석상에서는 장애를 사랑으로 극복했다면서 아내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존경을 표시한 바 있다.

한편, 인격장애인도 노벨상을 받았다. 베트남 평화협상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미국의 헬리 키신저와 월맹의 총리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것. 그러나 키신저는 전쟁광이자 국제적인 전쟁 범죄자였다. 그래서 이 둘에게 주어진 평화상은 노벨상 최악의 ‘어이없는 수상작’으로 손꼽힌다.

1974년 수상자였던 일본의 전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 역시 비슷한 수준. 에이사쿠는 일본이 핵 정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위험한 인물이다. 덧붙이자면, 정치가인 영국의 처질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면 도대체 선정 기준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에밀 졸라, 톨스토이, 입센, 릴케, 발레리, 죠지 오웰도 노벨상을 받질 못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장애인으로서는 노벨상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다리가 불편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 장애인의 삶의 질은 오히려 추락하였고, 정부 관료들은 장애인에 대한 정부 지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일부 장애인 단체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장애인 등록을 한 적이 없다.

이와 같이 노벨상 수상자 중에 꼭 장애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장애를 가졌던 인물들은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들을 수상자로 선정했던 노벨상 선정 위원회와 또 수상 장면을 지켜본 세계인들 역시 수상자들을 장애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어쩌면, 장애를 딪고 일어선 위대한 천재로 보았을 지 모를 일이다.

결과야 어쨌든,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처럼 장애인 복지운동가로 활동하며 결국 장애인 아들의 아픔을 다룬 [개인적 체험]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장애인은 노벨상 수상의 대상일 뿐 주체로서 정당한 대접을 못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장애인은 이 세상의 당당한 주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자본가들이 원하는 만족할 만한 이윤을 재생산하지 못하며,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히틀러는 ‘유전학적 질병을 가진 후손 출생 예방법’을 제정하여 장애인을 강제 불임시켰으며, 그 이전에 미국에서도 장애인을 강제 불임시키려고 했던 끔찍한 역사가 있다.

최근 기록을 보자면, 영국의 전 수상이었던 대처도 실업자와 기혼 남성, 장애인들을 강제 불임시킨 전력을 갖고 있다. 또 대처 수상 재임 당시 정부 주최 아동 문학상에 정신질환 병력을 가진 아이가 대상에 선정되자 부랴부랴 수상을 취소한 적도 있다. 하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옥스포드 대사전을 감수한 사람이 정신질환자였다는 사실조차 지금까지 숨겼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장애인은 지적으로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 현실은 정반대의 사실을 가리킨다.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현대 스페인의 최고 거장이며, <아란훼즈 협주곡 >, <4대의 기타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 등 걸작을 남긴 호아킨 로드리고 는 시작 장애인이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작곡가인 밥 딜런이 거론된 것만 봐도 호아킨 로드리고는 노벨상을 받고도 충분하다.

그리고 우주의 탄생을 밝힌 현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물건을 잡지도, 걸음을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근육병 장애인이다. 그런데 호킹 박사는 노벨상은커녕 부인에게 상습 폭행마저 당한 불행한 경험을 체험해야 했다. 이것이 마치 장애인의 운명이라는 듯이.

노벨상은 노벨상 선정 위원회가 주고 싶은 데로 주는 상이라는 건 틀림없다. 노벨상을 반대하는 안티 노벨상이 존재하고, 올해 안티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 고등학생의 연구 주제가 ‘땅에 떨어진 음식을 5분 내로 주워먹었을 때’였으니 노벨상의 위상을 알만 하다. 화학상은 영국의 오염된 강물을 정수 처리한 생수를 판매한 코카 콜라 사가 받았다. 생수에서 발암 물질이 발견되었기에.

이제 정리해보자. 노벨상은 장애인의 운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이너마이트의 개발자이자 당시 악명을 떨친 무기 상인이었던 노벨이 죽기 전에 참회하는 뜻에서 그때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상금 11억원을 내걸고 평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했던 것.

하지만 이 11억원은 전쟁 와중 다이너마이트라는 신무기로 인해 손과 발이 절단되어 한 평생을 눈물과 고통 속에 살았던 장애인의 삶과 뒤바꾼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크리미아 전쟁을 손꼽을 수 있다. 나이팅게일로 더 유명한 이 전쟁에서 다이너마이트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고, 이와 함께 노벨은 돈과 명성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사망자와 평생 장애인이 된 사람들은 수십만명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이 참회의 유언장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인물에게 노벨상을 주라고 했다면 더 정확한 참회가 되지 않았을까 아쉬운 게 바로 이 대목이다.

결론이 어떻든, 노벨상 수상자에 장애인이 선정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거의 없어 보인다. 가능성은 쥐구멍에 볕들 날 정도. 어찌하랴. 노벨상 선정위원 중 10%를 장애인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강제 규정이 없는 한 비장애인들의 축제가 될 게 뻔한데. 아예 이참에 전세계의 장애인이 대동단결하여 비장애인 노벨상을 반대하는 장애인 노벨상을 제정한다면 또 모를까.

만일, 장애인 노벨상이 만들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기쁠 것 같다. 출간될 기회만 없을 뿐이지 대단한 문장력을 갖춘 장애인이 얼마나 많은가. 장애인 10명 중 5-6명은 시나 소설을 쓰고 있거나 앞으로 쓸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중증 장애인의 경우 이동권의 ‘장애’로 인해 밖으로 외출을 잘 못하는 상황이다 보니 그만큼 상상력의 깊이를 키우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향후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장애인이 나타나면 그건 장애인을 차별하는 이 사회의 참혹한 장애인 차별 구조에 감사를 드려야 할 것같다. 이렇게!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

“평소 저는 방 안에 가둬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에게 먼저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의 뜻대로 저는 계단과 길 턱을 넘지 못해 방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지내야 했습니다. 또 장애인에 대한 사회보장 혜택을 대폭 줄인 것도 더욱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남들은 취업하려고 고생할 때 저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주린 배를 부여안고 작품을 써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삶은 지옥이 되었고, 저는 태어나자마자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합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느낄 수 있다면 그날은 장애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정부가 무너지는 날이 될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노벨상을 정부에게 바칩니다. 정신 차리라고.”

[기사제휴=이훈희 http://www.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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