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일본에서 그 어느 달보다도 독특한 달이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가 있었고,로 비유되고 영화 제목도 있었지만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을 알리는 천황의 녹음 방송도 있었다.매년 8월이면 일본 각 매스컴은 전쟁의 잔혹함을 거의 피해자 중심으로 특집방송과 기사를 매일 내보낸다. 올해는 종전(패전) 75주년이라서 다른 어느 해보다 전쟁 특집방송과 기사들이 넘쳐났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이러한 가운데 전쟁과는 전혀 상반된 기사가 눈에 띄었다. 매주 월요일에 게재하는 마이니치신문
7월 2일자 제주우체국 접수 날인이 찍혀진 제주문학 여름호가 8월 3일 오사카 우리집으로 배달되었다. 꼭 한달 걸렸다. 코로나 이전에는 일주일도 채 안 걸려서 오는 우편물이 그야말로 바다 건너 산 넘어 어렵게 왔다. 지난 번 봄호가 왔을 때도 썼지만 그렇게 어렵게 온 제주문학이 참 반가웠다.이번 호에는 필자가 쓴 졸작 '오사카 하늘 아래서'라는 단편도 게재되었다. 소설에 대한 평은 전문을 게재 않고 또 구입해서 읽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제주투데이에서 읽은 감상이나 평은 자제한다고 필자는 써왔다. 그래서 필자가 쓴 작품에 대해서도 생
"아니! 어떻게 이런 조형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7월 28일 일본 TV 낮 뉴스를 보던 필자는 깜짝 놀랐다. 순간적인 혐오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위안부 소녀상 앞에 정장을 한 남성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모습이었다.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히데요시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것은 국제의례상 허용되지 않는다면서 한일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이 뉴스는 28일 저녁 7시 NHK TV를 비롯하여, 29일 일본의 TV 각 방송국의 여러 방송 프로에서 일제히 방영되
지난 달, 갑자기 김은국 소설 가 읽고 싶어서 이틀 밤 사이에 전부 읽어버렸다. 한국에 있을 때 한번 읽고 일본에서는 두번 읽어서 세번 째 완독했다. 나이와 더불어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는 김은국이 30대 초기 1964년에 영문으로 쓴 첫 장편소설로서 주목을 끈 작품이다. 줄거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해 평양을 점령한 유엔군과 한국 국군도 같이 평양에 입성했다. 일인칭 소설의 주인공 나는 정보장교 대위로서 상관인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 장 대령으로부터 지시를 받는다.평양에서 실종된 14명의 목사가
"제가 뭘(잘못)했다고 4년 계속 이렇게 당해야 합니까!" NHK TV 기자가 폭우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쿠마모토현 농가에서 인터뷰를 할 때, 40대의 젊은 농부의 체념에 가까운 원망의 소리였다.대대적으로 대형 비닐하우스 10여개를 짓고 고소(중국과 동남아에서 흔히 사용하는 채소. 일본어로는 '파쿠치'라고 함) 출하 직전에 있던 농부가, 4년 연속 장마철의 폭우 피해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고소를 손에 들고 하소연 하는 그 모습은 시청자들의 가슴에 아프게 파고 들었다.이것은 작은 목격담의 취재에 불과하다. 100년
코로나바이러스로 오키나와현 이외의 내빈을 초대하지 않고 지난 6월 23일 오키나와 이토만시 마부니 평화기념공원에서 개최된 제75주년 '오키나와전(全)전몰자 추도식'에, 오키나와현립 슈리고등학교 3학년 다카라 아카네(高良 朱香音) 여학생의 자작시 낭송이 있었는데 인상에 남았다.추도시의 경우 그 추도에 연관된 단어와 관용어들이 추도시만이 아니고 추도사 내용에도 겹치기로 빈번이 사용되어 신선미를 떨어트리는 예가 많지만 이 시는 그러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마이니치신문은 6월 23일 석간과 24일 조간에 전문 게재했었다.
"자리물회라도 고찌(같이) 먹으러 갑주게" 여느 때 같으면 제주 제일중 선배들한테서 전화가 와서 빨리 총동창회 회의를 열라고 독촉 전화도 왔을 것이다. 몇년 전부터 '재일본 제주제일중총동창회"를 20년 가깝게 만년 총무를 하다가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그러나 올해는 그러한 전화가 한통도 없었다. 동창회만이 아니고 재일 제주인이나 아니면 자리 맛을 아는 일본인까지도 오래간만에 자리물회나 먹으러 갑시다 하고 연락이 오는데 그 연락도 없다.자리요리는 그 맛 자체 하나가 독립성 주체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교류적 역할을 해주는 강한 구심력이
일본 토쿄도, 가나가와현을 중심으로 이바라키현, 지바현, 시즈오카현 일대에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지나서 일어난 '칸토오대지진(關東大地震)'은 진도 7,9로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약 10만 5천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이 지진으로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가 떠돌았었다. "화약고에서 화약을 탈취하여 방화를 일삼고 있다."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있다."는 등의 선동 속에서 조선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모두 히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당시 일본인 약 4천명의 자경단이 조직되었는데 그들의 횡포로 조선
"뿌린 씨앗은 물을 주면 언젠가는 꽃이 핀다. 빨리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약 43년간 북한에 납치된 딸 메구미를 기다리던 부친 요코타 시게루 씨(87)가 스스로 뿌린 씨앗의 핀 꽃을 보기 전에 6월 5일 별세했다. 일본 납치 가족의 상징적 존재로서 일본 매스컴은 연일 대서 특필 기사로 다루었다.1977년 11월 학교에서 베트민턴부의 연습을 마치고 하교하던 니카타현의 중학교 1학년 요코타 메구미 학생이 사라졌다. 일본은행에 다니면서 부인 사키에(84) 씨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던 가족에게는 청천벽력
노래 '잃어버린 30년'은 재일동포들도 즐겨 부르는 애창곡의 하나이다. 남북 이산가족의 애달픈 그리움을 부른 노래라고 하는데 재일동포들에게 있어서도 고국의 부모형제들은 이산가족과 다름없다. 부모형제만이 아니고 고국의 친구나 모든 아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그렇다.서러움과 안타까움, 그리움들이 하나가 되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진 '잃어비린 30년'이었다. 이 그리움의 상징처럼 불리워오던 '잃어버린 30년'이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의 기자회견과 함께 애틋한 그리움에서의 '잃어버린 30년'은 '배신의 잃어버린 30년'으로 변하고 혐오의 대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치 돌연변이 사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한여름의 시원한 소나기처럼, 무척이나 목마른 갈증 속에 마시는 청량 음료수처럼 상쾌했다.이유근 컬럼자님께서 스스로 연재를 마치게 되었다는 독자들과의 작별 인사와 함께 쓰고 싶은 내용을 마지막으로 간추려서 썼다는 사실에 대해서이다. 이 말은 연재 과정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긍정적 평가이지 '연재 마침'에 대한 객관적 긍정성과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연재를 마친다는 글에 필자는 반대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연재 기획물이나 컬럼 등을 읽다 보면 갑자기 중단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코로나19바이러스는 세계 각국의 전염병 의료 관계 최일선에서 근무하는 담당자의 진료 상황은 물론 의료업무 시스템을 바꿔버린 미증유의 전염병이었다. 아직도 확고한 치료법 없이 오리무중 속에서 코로나는 확산되고 있다.종래의 전염병이나 일반 병과는 달리 생사의 위험 선상에서 날로 번져가는 코로나바이러스 공포 속에 담당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의료진들의 희생적 고군분투의 감동적인 미담들은 각국에서 넘쳐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 초기 당시, 확진자가 중국 다음으로 대량 발생한 한국은 세계의 따가운 눈총의 대상국이었다. 대구의 감염은 걷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