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울 때 꼭 마련해야 할 물건이 있었다.출산이 다가오자, 처형께서는 ‘임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태아 보험을 들어 놓고 몇 회분의 보험료를 납부한 보험증서를 보내왔다. 아내는 원만한 자연분만을 위해 임산부 기체조 교실에 열심히 다니는 한편, 배냇저고리를 비롯한 아기 용품도 대부분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지만, 서울에서는 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제주에서 널리 쓰이는 ‘아기 구덕’이었다. 글자 뜻 그대로는 아기 바구니라는 말이지만, 실제 쓰임새는 아기 요람이다.아기 용품을 파는 전문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나와 해가 막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에 놀기 시작할 때면, 무언가 짜릿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설레는 마음이 더했다. 물론 낮에 노는 것도 좋았지만, 어둑어둑 해질 때면 “밥 먹으라.” 하는 소리에 친구들이 하나둘 빠져 나가면서 흥 또한 빠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나오면 한동안 방해받지 않고 맘껏 놀 수 있었다. 게다가 밤에만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었다. 깜깜해지면 자치기나 구슬치기는 할 수 없지만, 깜깜해져야 더 재미있는 놀이다.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놀이는 아니었다. 깜깜한 밤중에 서로 숨어
성산포에서 반딧불이를 보았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해는 지고 어둑어둑해진 어느 여름날, 나보다 한 살 위의 오촌 아저씨와 동네 친구들 몇 명이서 동쪽 바닷가 언덕으로 갔다. 언덕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노란색인지 옅은 연두색인지 초롱초롱 작은 불들이 온통 언덕을 뒤덮으며 날고 있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반딧불이다!” 하면서 소리쳤다. 세상에나 이렇게 예쁜 불빛이 있다니!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밤하늘에 노란 빛이 끝없이 춤을 췄다. 그때는 성산포에 전기가 막 들어오기 시작한 때여서 해가 지면 금새 깜깜해졌다
곤밥이 먹고 싶었다. 배불리 먹고 싶었다. 쌀이 귀한 제주도에서 흰 쌀로 지은 곤밥을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엉겨붙어 떡이 되어버린 조팝을 한 끼라도 먹어본 사람이라면 곤밥이 얼마나 간절해지는지 알 수 있다. 곤밥이라면 간장 한 종지만 있어도 한 끼 뚝딱 먹을 수 있겠다고 할머니도 가끔 말씀하셨다. 사과도 먹고 싶었다. 반쪽이나 반에 반쪽이 아니라, 나 혼자서, 마음껏, 사과 하나를 온전히 먹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새기 고기 한 점. 그 한 점이 먹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잔칫날이었다. 잔치 집에 가
이제 작살은 거두어도 좋다. 물안경 하나면 족하다. 한참을 헤엄쳐 검은여로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물속을 바라본다. 와락 덤벼들듯 모든 것이 가깝게 보인다. 두려움 속에서 살펴본다. 동그란 공기 주머니가 달린 모자반이 물 위로 오르는 듯 흔들거리는 사이로 자리돔 떼가 헤엄쳐 다닌다. 꼬리를 흔들며 살짝 방향을 바꿀 때마다 은빛 검은빛을 오간다. 노란색 초록색 줄무늬의 코생이, 어랭이 같은 물고기도 있다. 검은 바위 위에 크고 작은 수초들 사이에 빨간색 말미잘과 불가사리도 보인다. 바닷물 속을 볼 때마다 아득히 먼 옛날 어느 곳에 와
6학년 형, 누나들은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옷가지들을 넣은 가방들 사이로 용설란이나 문주란 따위의 뿌리에 묻은 흙덩이가 비닐로 잘 감싸인 채 놓여 있었다. 서울 사람들에게 줄 선물이라고 했다. 그 흔한 문주란이 서울 사람들에게는 귀한 선물이라는 것이 신기하게만 생각되었다. 형편이 좋은 집에서는 전복이나 옥돔 같은 귀한 해산물을 선물로 준비했을 터였다.오늘은 6학년들이 서울 구경 가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몇 명이 모이기만 하면 으레 서울 구경이 화제로 떠올랐다. 남대문도 구경하고 남산에 올라 빌딩이 숲을 이룬 서울 시내를 한눈에
성산포에 처음 왔을 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나와 남동생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녔다. 남동생도 나도 머리가 둥근 편이라 빡빡머리가 그리 흉해 보이지는 않았다. 동생은 “새야, 새야” 하면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는데, “형아, 형아” 하는 부산 사투리였다. 둥글둥글 빡빡머리 꼬맹이가 “새야, 새야” 하며 알 수 없는 사투리를 하고 다녔으니 동네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은 나를 따라다니는 동생을 볼 때마다 “새야, 새야” 하며 흉내 내기도 하고 괜히 빡빡머리를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음식 한두 가지는 품고 사는 듯합니다. 저에게는 ‘멜 뎀뿌라’가 그런 음식입니다. 제가 살던 제주도에서는 멸치를 멜이라고 불렀고, 뎀뿌라는 튀김을 뜻하는 일본말이지요. 그러니 ‘멜 뎀뿌라’는 요즘 같으면 ‘멸치 튀김’이라고 부를 듯합니다. 멜 뎀뿌라는 꽁치보다야 작지만 웬만한 국물용 멸치보다 훨씬 큰 놈들로 튀긴 음식입니다. 확실히 어른 가운뎃손가락보다 큰 멸치로 튀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주에서도 멸치는 그다지 귀한 생선은 아니었지만, 멜 뎀뿌라는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습니다.남해안만큼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