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산형무서 옛 터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비석이 그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저 굶주리고, 뼈만 앙상해 재판을 하는 건지, 뭘 하는 건지 몰랐어. 그저 총살당하는 것을 면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지”

57년 전 불법체포, 불법구금, 법재판에 의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고봉원(78), 고윤섭씨(78)가 당시 수감됐던 형무서 터를 돌아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9일 아직도 규명하지 못한 이 비극의 역사 현장을 순례하고, 30일 4.3 이후 57년 만에 부산 형무소에서 첫 진혼제를 봉행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 마산형무소에서 진공스님이 죽은 원혼들을 달래고 있다.
특히 부산형무소는 제주 4.3사건 당시 불법군사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은 499명의 도민들이 한국 전쟁 발발 전후에 대구 형무소에서 이감된 곳으로, 다시 마산과 진주형무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수형인들 대부분이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이번 순례에는 당시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가 동행해 57년 전 수형생활의 실상과 처참했던 당시 생활을 생생히 들려줘 행방이 베일에 가려진 대부분의 희생자들의 고통을 대변했다.

29일 오후 12시경 4.3관련 단체 관계자와 금강사 주지 진공스님 등 40여명의 순례단은 마산형무소(부산형무소 마산지소)에 도착했다. 현재 마산시 오동동 주차장과 삼성생명 자리가 옛 마산 형무소 터로 형무소의 잔재는 찾을 수 없었고, 단지 형무소 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그 존재를 말해주고 있었다.

▲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옛 마산 형무소.
“50년 10월 경 일게야. 부산형무소에서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서 이곳으로 끌려왔어. 의식이 없어서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었지. 겨우 밥 한 끼 먹고 살아났어. 150명이 함께 왔는데 나갈 때는 41명이 나갔지. 나머진 소리 없이 죽은 게야” 고봉윤씨 증언이다.

마산 형무소는 부산,대구 형무소와 함께 북괴군이 점령되지 않은 시설 중 하나로 7월 말 진주지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마산은 전선과 더욱 가까워지고 최후의 보루가 됐다.

고 씨는 이어 “그 때는 벽돌담이 높아 밖을 내다볼 수가 없었어. 마산 형무소는 그래도 부산형무소보다는 사람 사는 곳이었어. 이곳에서 6년 옥살이하다 56년 출감됐지. 내가 이곳을 살아서 오게 될지 몰랐는데 여기와 보니 마음이 참 착찹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얘기 서울도 여러 번 가서 말해도 그 때 뿐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죽으면 희생자 되고, 총 맞아도 희생자 되고, 또 자손들은 유족 대우라도 받지만 살아있는 우리는 소용없지, 무슨 보고서니 대통령이 뭐라고 해도 우리는 소용없어”라며 체포.구금자는 4.3 희생자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전했다.

▲ 진주 형무소 터임을 알려주고 있는 팽나무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 팽나무는 그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을까?
마산형무소에 이어 순례단이 찾아간 곳은 진주형무소(부산형무소 진주지소)다. 진주형무소는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6.25 당시 1000여명이 재소자가 수용됐다.

진주형무소 터는 현재 상봉한주타운이 위치한 곳이다. 80년간 이 자리에 위치하면서 한일합방, 8.15 해방, 6.25 사변 등 사회격동기를 지켜온 팽나무가 옛 진주 형무소 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 고윤섭씨가 진주형무소에서 겪었던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고윤섭씨는 “54년 12월 당시 내가 27살이었지. 아마. 대구에서 기차다고 진주로 넘어왔어. 진주형무소에서 조몽구씨를 만났어. 이 분은 무장투쟁을 반대한 분인데 강경파에서 밀려서 이곳에 온 게지. 나는 56년에 나오고, 조몽구씨는 60년에 나왔을 게야”라고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그는 “그 당시 팽나무도 그대로 있구먼. 내가 살아서 이곳에 오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 죽은 사람들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반드시 진상규명이 돼야지. 그 분들의 원혼을 달래줘야 할 게 아니냐”라고 한탄했다.

▲ 진주형무소 옛 터에서 순례단은 진공스님과 함께 독경을 하며 원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이 곳은 한명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진상규명이 반드시 필요한 현장이다.
4.3 진상보고서에서 당시 형무소에서 옥사 또는 병사한 희생자의 명단 일부를 적시해 그 당시 실상을 부분적으로 밝혀주고 있지만, 많은 희생자들의 행방을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진주형무소는 한명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반드시 진상규명이 필요한 역사의 한 순간이다.

순례단은 아파트가 들어선 옛 진주형무소 터를 뒤로 하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발길을 옮겼다. 6.25 전쟁발발과 동시에 포로의 수가 증가해 육지와 격리된 섬인 거제도에서 포로를 관리했던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첫째날 일정을 마쳤다.

▲ 현재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신위로 대신했다. 그 신위가 진상규명 촉구를 바라는 듯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부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진주형무소에 갇힌 채 오매불망, 부모 형제와 정다운 벗이 있는 고향 제주에 돌아갈 날만 그리던 영령들이시여!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해원하소서”

30일 오전 11시 30분 순례단은 부산 형무소 옛 터에서 부산(마산,진주) 형무소 수형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를 통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령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부산형무소에서의 진혼제는 제주 4.3 사건 이후 57년 만에 처음 이뤄지는 것으로, 진상보고서에 명시된 희생자의 이름을 적은 신위와 현재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신위를 모셔 진행됐다.

▲ 생존자인 고윤섭씨와 고봉원씨가 묵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혁 운영위원장은 초혼에서 “억울한 님들이 가신지 반세기를 넘어 57년 만에 님들을 찾아 위령하고자 이 곳 부산광역시 동대신동 옛 부산형무소 터에 모였다”며 “님을 향한 제단에 향을 사르고 간절히 청하오니 이 정성 받아들여 눈물을 거두시고 한을 푸소서”라고 고했다.

또 김평담 공동대표는 주제사를 통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부산, 마산, 진주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졸지에 숨져간 억울한 4.3 영령들이여, 오늘에서야 왔다”며 “조금 더 일찍 나서지 못한 죄스러움을 멈춰서는 안 될 교훈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걸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 진공스님이 천도의식을 하고 있다. 영령들이여 편히 쉬소서.
이어 김태환 도지사를 대신해 제주도 4.3사업소 문종환 담당은 추도사에서 “제주 4.3 특별법의 개정을 통해 그동안 미진했던 부분들에 대한 구체적인 진상규명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며 “제주 4.3이 더 이상 비극과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완전한 해결로 상생의 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김두연 제주도 4.3사건희생자유족회 회장은 “유골 한 조각 찾을 수 없어 봉분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고, 죽은 날을 몰라 생일을 기일로 정해 봉제사를 지낸지 반 백년이 훌쩍 지났다”며 “이 행사는 모든 수형인이 희생자로 결정되기를 촉구하는 무언의 함성”이라고 의미를 뒀다.

▲ 진혼제가 끝난 후 희생자의 신위를 불태우고 있다. 부디 영면하소서.
또 순례단을 대표해 당시 부산형무소에 수감됐던 고봉원씨(78)씨가 공동 결의문을 채택하며 “사실상 4.3 진상규명 사업을 중단시켜 버린 현 상황을 인식하고, 4.3특별법 개정안을 반드시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라며 결의했다.

이어 진공 금강사 주지스님이 4.3 영령들을 위로하는 천도의식과 헌화와 분향이 진행됐다. 분향이 모두 끝난 후 당시 희생자인 고봉원씨와 고윤섭씨가 그동안 참아왔던 한과 고통을 털어놓으며 오열해 주변을 숙연케했다.

현재 4.3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완전한 해결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번 부산,마산,진주 형무소 순례와 진혼제는 계속적인 진상규명 사업을 촉발하는데 그 의미가 자못 크다.

   
▲ 잊고 싶다."대구가서 한 달 쯤 되니까, 형무관이 알려줬다. 징역 15년 국방경비법 위반이라고..."

그 당시는 살려고 피신생활을 했다. 48년 10월 20일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49년 4월 초 살려준다는 전단을 보고 산에서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 서귀포 토평동 군부대 주둔소에 갔다. 그 곳에서 서귀포 경찰서로 갔고, 다시 동척회사로 갔다.

동척회사에서 재판을 받았다. 100명이 관덕정 법원으로 갔는데 검찰관도 위관 군인도, 재판관도 아니었다. 100명이 법정에 들어서니 앉을 수가 없었다. 한명씩 호명이 되는데 한 30분 걸렸다. 이게 재판의 전부다. 이름 부르니까 재판이 끝난 것이다.

그해 7월 29일 대구 형무소로 갔다. 동척회사에서 배를 탔는데 2100여명이 탔다. 육지 7개 형무소로 이송되는 것이다. 대구서 한달이 지나니까 형무관이 국방경비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무슨말인지 알수가 있어야지...

▲ 결국 오열하는 고씨.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왔다. 부산 형무소는 도살장이었다. 밤 11시쯤이 되면 트럭소리가 매일 났다. 그 소리는 사람들을 방 순서대로 태워가 죽이러 가는 소리였다. 우리 옆방까지 모두 태워갔다. 이제 우리방 차례였다.

그런데 우리방은 부르지 않았다. 시찰구로 저쪽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고 양팔을 흔들었다. 알고 보니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해 이승만이 그만 죽이라고 했다고 들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러다 50년 10월 마산형무소로 이감됐다. 마산에 갈 때는 한 150여명이 갔다. 나머지는 모두 죽은 것이다. 그리고 56년 출소해 제주로 왔다. 그리고 55년만에 다시 부산형무소를 찾았다. 가슴이 메어지는 고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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