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지창조 <프레스코. 1508~1512년. 로마 바티칸궁>
미켈란젤로 < 이탈리아.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 대표작 : 다비드, 최후의 심판, 피에타 등>

작년 이맘때쯤 유럽 여행의 기회가 주어져 바티칸에 있는 성시스티나 성당을 찾았다. 성당 문을 들어서는데 고개를 높이 들고 말 없이 서 있는 사람들 모습이 예수의 강림을 보러 온 군중처럼 보였다.

그들 처럼 나도 천정을 쳐다보는 순간 숨이 막힐것 같은 놀라움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일행이 그만 나가자고 할 때까지 조각 같은 그림을 노려(?) 보았다. 여행 스케줄이 마음에 차지 않아 툴툴거렸는데 <천지창조>를 볼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였고, 저 그림은 아무리 뛰어난 사진가가 촬영을 한다 해도 그 느낌을 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토록 미켈란젤로를 찬양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거대한 근육질의 인물, 하나님의 발뒤꿈치가 나에게로 쿵하며 내려올 것 같은 느낌, 천장화라기 보다 홀로그램처럼 공중에 떠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 그리는 일을 맡은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요구가 마음에 차지 않아 그 곳에서 도망쳐 채석장에 숨어 지내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잡혀와 당신의 의지대로 그려도 좋다는 양해 하에 작업의 프로그램을 짜고 거기에 따라 일을 진행해 나갔다. 

천장 밑에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프레스코 기법으로 천장에 물감을 칠해 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는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파격적인 그림이다.

지금도 성당에 가면 여자들은 미사포를 써야한다. 왜냐하면 여성의 머리카락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종교적인 관습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그 시절은 더 심하여 여성들은 미사시간에도 뒤끝에 숨은 듯이 있어야 했었다.

여성 즉 이브는 아담을 유혹한 죄의 근원이기에. 그런 성당 천장에 감히 벌거벗은 여자와 남자를 그려 넣은 미켈란젤로에게 박수를 보낸다.

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여기에서 바로 르네상스의 정신을 읽을 수 있는데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는 그냥 자연 자체라고 여겼음이다.

하늘, 바다, 나무, 동물들 처럼 자연의 한 구성원일 뿐이다. 십계명이나 온갖 종교적인 굴레 없이 꺼리낌 없는 본능으로 살아 숨쉬는 인간 그 자체를 표현하고 싶었음이 아니었을까. 인체해부학적 시선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미켈란젤로의 의지가 담긴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의 창조는 하느님의 손가락이 아담과 접촉할 때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모습이 압권이다. 그는 하느님을 의인화 하면서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를 아낌없이 그려내고 있는데 놀랍게도 정작 본인은 그 그림 때문에 하느님께 큰 죄를 저질렀다고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얼굴이 그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2세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란다. 이 그림을 그릴 때 교황이 자신의 얼굴울 모델로 그리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메디치가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 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정은 남겨진 편지나 시에 잘 담겨 있다. 그의 예술은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우울한 신앙의 미적 형상이며,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이해

새로 일어난 세속미술이 있으나, 여전히 그리스도교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개인으로서의 창작을 존중하고 종교적 주제에 대해 자유로운 해석과 개성에 입각한 표현을 하였다. 중세양식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발판을 고전 예술양식의 부활에서 구하고, 사물의 객관적 관찰에 입각한 자연주의적 묘사를 중시하였다.

대규모의 벽화, 천장화로써 성당 안을 장식하였는데, 프레스코화가 보편적이었으나 말기에는 유화가 많아졌다.

투시도법과 자연주의적 인물, 사물 묘사에 의하여 장면 묘사는 매우 현실적이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그리스도교 미술은 그 속에 이교적 또는 세속적 감각이 들어가, 예술가는 내면적 종교감정의 표현보다도 외적인 여러문제, 즉 인체의 해부학적 정확성, 공간표현의 3차원성 등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종교미술은 차츰 종교에서 독립하여 미술을 위한 미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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