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정상부에 설치된 봉수와 해안 구릉에 설치된 연대는 제주의 옛 통신시설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문명은 개인의 집에서 전 세계의 지형지물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지구촌 세상을 가깝게 만들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세계 각지의 구석진 마을까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의 구글어스 프로그램을 통해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는 요즘이라지만 현재의 시각으로 문화와 역사시설물을 판단할 수는 없다. 예전에는 눈으로 보는 것이 다였을 터이고 봉수대와 연대가 설치된 곳은 시야가 트여 한눈에 적의 동태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내가 가본 연대라고 해봐야 대포주상절리 해안의 끝자락에 위치한 대포연대와 산방산 앞에 위치한 산방연대가 다이다. 내가 가본 두 곳 연대가 설치된 곳은 말 그대로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이 수평선까지 시원하게 보이는 경치는 탄성을 절로 쏟게 하지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제주에 이러한 봉수대와 연대가 많이 분포하여 항상 마음을 죄며 살아야했던 제주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인다.

제주도(1996), 『제주의 방어유적』에 관한 자료를 보면 ‘ 왜구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이 땔감과 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왜구들은 고려 말부터 제주에 빈번히 침입하여 방화, 약탈, 인명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없이 제주에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왜구 침입에 대비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체제는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충렬왕 28년(1302)에 봉수 설치가 시작됐고, 조선시대에는 세종 19년(1437)에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防護所)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주성ㆍ정의성ㆍ대정성 3성만이 축성되어 있었고, 봉수시설도 22개에 불과했었다. 조선조 제주도의 방어체제로 알려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는 그 이후에 차례차례로 정비되어 완성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오름 정상에 있는 봉수대는 50리 너머를 감시하고, 연대는 현장 가까이서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에서 먼 해상에 나타난 배를 발견하고 연대에서 적의 배인지의 여부를 식별하였던 셈이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시설을 하였고, 연대는 만일의 경우 적과 대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해안 전투 시 유리한 곳에 돌로 쌓았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연대는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 많아 38개의 연대 중 23개소의 연대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나 봉수는 개발이 되어 원형이 손상되거나 수풀이 우거져 그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가 않다.

산방연대는 화순마을에서 산방산 방향으로 넘어갈 때 가장 높은 지점의 언덕에 번듯하니 자리 잡고 있다. 연디동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대정현 소속으로 별장 6명, 봉군 12명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으로는 5.7km의 당포연대와 서로는 6km의 무수연대와 교신하였다고 한다.

6.25때 없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그곳에 올라서면 산방산에 올라서는 것 못지않은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아니 바닷가 화순해수욕장 방향의 풍경까지 고려한다면 시야가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화순해수욕장, 용머리해안, 하멜상선, 사계리해안, 송악산과 바다위의 형제섬, 마라도, 가파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며 이곳에 연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발견한다. 원형대로 복원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제주가 잦은 왜구의 침탈아래에서 신음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해 봉수와 연대가 많이 축조되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떠올려본다. 이는 척박한 제주땅을 일궈야 했던 제주인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자 고통이 되지 않았을까. 제주를 이해하는 것은 화산섬 제주자연의 아름다움 너머 제주사람들의 지나온 역사를 조금이나마 아는데서 시작되리라고 여긴다.  

<제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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