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의원의 '여기자 성희롱 사건'이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 벌인 여기자(女記者) 성희롱 사건은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첫 번째는 2003년 당시 서울시 정무부시장이던 정두언 의원의 술자리 사건이고, 두 번째는 2006년 최연희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여기자 추행 사건, 그리고 이번이 3번째이다.

다른 정당의 경우에도 비난받아 마땅한 성 스캔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2002년 2월에 제주도 우 모 지사(새천년 민주당 소속)가 집무실에서 지역 여성단체장을 성추행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다만 총선이라는 지극히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 특정 당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여기자 성희롱 파문>에 국한하고 다른 사건들은 접고자 한다.

첫 번째, ‘왜 하필 정치인과 여기자인가?’ 남녀의 성(性)적 접촉이나 관계는 정치와 권력이라는 두 가지 차원을 내포한다. 성적 접촉이나 관계는 서로의 교섭과 타협이 전제되어야 가능한데 이것을 구비하지 못한 경우에는 힘으로 눌러 어느 한 쪽이 욕구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데이트 중에 남성이, 직장에서 상사가, 대학에서 상급생이, 스포츠 팀에서 감독이 성추행이나 성희롱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자, 특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정점에 선 중앙언론사에 소속된 여기자에게 공개 석상에서 손을 대며 희롱할 수 있는 집단은 정치인들 외에는 존재하기 어렵다. 혹 더한다면 언론사의 상급직책에 있는 권력자가 있을 뿐이다. 여기자 성희롱 파문에 늘 정치인이 연루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치권력은 그 성격상 1차원(행태적 권력)과 2차원(구조적 권력), 3차원적 (구성적 권력) 권력으로 분류한다.

1차원적 권력은 문제가 생기면 힘으로 해결해버리는 능력이다. 돈이나 경찰력, 인사권자를 통한 압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이다. 2차원적 권력은 문제를 사회적 쟁점으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힘을 가리킨다. 아젠다를 설정하는 주도권의 문제이다. 3차원적 권력은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통제하는 권력인데 이데올로기 지배, 교육을 통한 이념 주입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치인과 언론사 기자는 이 3가지 차원의 권력을 두루 지니고 있지만 정치인은 1차적 권력, 언론사 기자는 2차적 권력을 주력으로 해 힘을 행사한다. 결국 정치인에 의한 여기자 성희롱 파문은 한국 사회 속에서 1차 권력집단과 2차 권력집단의 <힘의 균형>이 어떻게 기울어져 있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나라당에게 보다는 언론에게 더 심각하다. 민주화 이후 제 4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해 <대통령 만들기>에도 나설 정도라는 중앙 언론이었다. 그런데 IMF 환란 위기 이후 이권과 수익을 위해 권력과 금력에 굴복한 이후 정치권력은 어느새 여기자의 까다로운 질문공세를 귀여움으로, 앙탈로(?) 받아 넘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나라당에서 사건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 속에 답이 들어있다. 권력과 돈이 다른 당에 비해 더 축적되어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다른 당의 2~3 배에 이른 자산액을 보라. (각 당 의원 평균 한나라당 32억 4천만 원, 자유선진당 16억1천만 원, 민주당 12억 원... 아시다 시피 여기에 정몽준 의원 재산은 들어가지 못했다, 너무 커서). 또 신한국당.민정당 멀리 공화당 정권으로까지 이어지는 권위주의적인 보수 정치 이념, 정치.재벌.보수언론이 묶여 있는 가부장적인 카르텔에 이르기까지 女記者 성희롱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면 다른 당보다는 분명코 한나라당이 두드러진다.

앞으로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정치권의 대응. 2002년의 기억이다. 진보개혁을 부르짖던 열린우리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논객이던 모 의원마저도 개혁당에 몸담았던 시절 당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져 논란을 빚자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발언으로 진보 진영을 황당케 했었다.

이렇게 속으로는 다들 사소한 일이라 여기지만 정치적으로는 최대의 호재이자 악재로 삼고 공세와 방어에만 급급할 것이 뻔하다.

둘째는 언론의 대응.과연 이 문제의 핵심과 본질이 무엇일 지 고민할 것인가?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에서 피해자는 <왜?>라고 질문을 던지지만 가해자는 <왜?>라는 질문을 피하기 마련이다. 가해자의 회피는 당연히 책임을 덜기 위한 것이다.

정몽준 의원도 전혀 뜻하지 않게 닿았다고 한다. 이전의 사건에서도 가해 정치인들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가벼운 터치였다, 친근감의 표현 정도였다고 <왜?>라는 질문을 피해갔다. 그러나 피해자의 <왜?>는 다르다.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그 상황을 스스로에게 어떻게든 설명해 자존감을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한다면 <내가 못나고 힘이 없어서>라는 처참한 이유만이 제시되기에 피해자는 <왜?>라는 이유를 따져 물어 폭력의 상처를 떨쳐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지사 성추행 사건 때에 제주 지역 언론은 성추행 사건이라 부르지 않았다. 성추행 - 논란, 공방, 의혹, 고소사건, 주장 사건... 이렇게 부르며 성추행이 문제가 아니라 성추행을 소재로 덤벼들고 시끄러이 구는 게 문제라는 시각으로 일관했다.

권력의 카르텔을 이룬 토호 세력들이 자신들의 한 축이 위협 받자 본능적으로 결집해 물 타기에 나섰던 것이다.

이 사건을 놓고서는 보수언론, 피해 당사자 언론사, 지역 언론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일 지 주목해 보자. 그리고 그것은 그나마 2차적 권력으로 권력의 제 4부에 올라선 언론사, 중앙 언론사 소속 여기자의 처지임을 분명히 하자.

힘없고 돈 없고 배경 없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그 형제애를 배신당하며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결코 허투루 생각지 말자.<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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