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묻힌 마을터

▲ 삼양동 선사유적지.ⓒ김영학기자
사람은 천성적으로 비와 바람으로부터 자기 방어의 본능을 타고났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용암동굴과 바위그늘이었는데, 제주는 특히 화산 활동으로 굴들이 많기 때문에 쉽게 그런 곳을 찾아 의지할 수 있었다.

이런 지형으로 현재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100여 군데가 넘고 있다. 이제까지 확인된 동굴유적으로 애월 빌레못동굴, 금능 한드르동굴, 고산리 동굴, 김녕 궤네기동굴, 서귀포시 대포리, 한림 협재리, 성산 온평리, 서귀포시 색달동 등 10여 개소가 알려져 있다.

바위그늘 유적은 서귀포시 서귀동, 북촌리, 억수동 등 30여 개소가 넘는다. 이들 용암동굴과 바위그늘은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처로 이용되었음이 애월 빌레못동굴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고산리 유적을 통해서는 이들이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동물과 어류를 잡아먹으며 살았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 동굴과 바위그늘은 거의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기후 등 자연조건의 영향을 감안하면 시기에 관계없이 이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마을은 주민들이 모여 사는 기초 공간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여럿이 모여 회의를 하는 장소와 경작하는 땅, 분묘, 의례장소, 조개무지 같은 쓰레기장들도 있게 마련이다. 제주도에서 마제석기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이런 집단은 시기적으로 상모리 산이수동 바닷가 유적이 가장 앞서 있다. 이 유적은 해안에 위치한 낮은 언덕에 있으며, 인근에 패총도 있다. 최근 발견되어 시기 논쟁이 일고 있는 석기시대 사람과 새 등 발자국도 여기에서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있다.

이 유적에서 특기할 점은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라는 분명한 자료들이 나타난다. 출토된 석기류 중에 나무를 자르고, 가공하는 기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제주국제공항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용담동 월성마을 유적의 경우 장방형 주거지 1기, 지상식거주지 2기, 부정형유구 1기 등의 주거지와 수혈식 석곽 1기, 기타 분묘 관련 돌을 쌓은 시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어디보다 큰 거점취락(據點聚落)은 최근 복원하여 오는 29일에 개관하는 제주시 삼양동 유적이다. 이 유적은 해발 20m 정도의 해안, 꽤 넓은 대지에 형성된 제주도 최대의 마을유적이다. 전체 규모가 10만 평방미터나 되나 전체를 조사하지는 못했다.

학자들 중에는 아직 보고서가 나오지 못한 1지구와 5지구를 그냥 두고 복원부터 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사가 끝난 지대에서는 주거지(住居址) 236기를 비롯하여 창고, 야외노지(爐址), 마을의 공간을 나눈 석축, 패총 등이 확인되었으며, 멀지 않은 곳에 고인돌 군락도 있었다.

삼양동에서 드러난 주거지 가운데 내부 조사를 거친 것은 155기이며, 주거지 중 가장 큰 것은

▲ 삼양동 선사유적지의 움막 내부에 꾸며논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김영학기자
직경 6.6m 정도이고, 일반적으로는 4~5m의 크기들이다.

주거지의 배치 형태를 통해 확인되는 마을의 구조는 직경 6m 정도의 대형 주거지 1기에 12~15기 정도의 소형 주거지가 배속되는 단위주거군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들 단위주거군의 중앙부에는 야외노지가 있는 광장이 위치한다.

그리고 이런 야외노지가 있는 광장은 공동회의와 같은 집회 장소로 사용됐을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단면 원형 또는 삼각형의 점토대 토기와 함께 고배(高杯) 편이 존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심발형 및 옹형의 대소 무문토기인 소위 삼양동식(三陽洞式)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곽지리식과 회색연질토기가 부가되어 있다.

삼양동 유적은 시기적으로 적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 이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하고 있다. 출토된 탄화 곡물은 삼양동 마을에서 벼나 보리, 콩 등을 재배했거나 육지와의 교역을 통해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기록에 “마한 서쪽에 있는 큰 섬인 주호(州胡)가... 한중(韓中)과 배를 타고 교역을 했다”는 내용은 삼양동 유적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적은 바닷가 언덕에서 수렵과 어로, 농경을 하면서 집단생활을 하고, 인접지역과 교역을 통해 재화를 축적하여 제주의 다른 지역 마을들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점했을 가능성이 크다. 삼양동 유적은 고대 제주에 위치한 마을로서 가히 한 나라를 연상하게 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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