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최진실. <노컷뉴스>
"그래, 사랑을 해라, 사랑을 해! 이 지랄들아"

최진실은 친구였다.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기자이면서 왜 그녀의 죽음에 대해 기사 한 줄을 쓰지 않고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기사를 쓰려고 했지만 컴퓨터 화면에는 '최진실'이라는 이름 석자밖에 쓸 수가 없었다. 친구이기 때문이다.

1991년 1월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입사한 한 허름한 잡지사에서 데스크의 첫번째 배당이 '최진실 인터뷰'였다. 간신히 본인과 전화통화를 했지만 인터뷰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1일까지 우린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 '친구'처럼 지냈다. 너무나 잘 알기에 특종을 한 적도 있고, 너무나 잘 알기에 기사화하지 못한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물론 알고도 낙종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조성민과의 결혼'도 낙종했다. 그 낙종으로 인해 내겐 '전날밤 최진실이랑 술먹고 결혼기사 물먹은 기자'라는 오명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10월 1일 이후에 '전날밤 함께 술먹고 친구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놈'이라는 낙인이 또 찍혔다.

'친구 최진실'과의 17년간의 수많은 일들을 기자로서 혹은 친구로서 정리할 날이 오겠지만 아직은 내 슬픔이 그렇게 단단해지지 않았다. 아직도 침대에 누우면 "오빠! 자?"라는 전화가 걸려올 것 같고, 넋놓고 있을 땐 "오빠! 나 사고쳤어!"라는 환청이 들린다. 아직 내가 '친구 최진실'을 가슴에서 놓아주지 못한 탓이다.

몇 개 방송에 출연해 '최진실'을 이야기했지만 알맹이는 없다. 고정프로그램이어서 출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월 1일 밤, 술 잔 속에서 오고간 수많은 대화, 9월 28일 '친구 최진실'이 직접 끓여준 칼국수와 '장밋빛 인생'의 김종창 감독이 선물해줬다는 딱딱한 오징어를 타박하며 나눴던 이야기들, 9월 25일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양장피 안주를 하나도 건드리지 않으며 함께 나눠마셨던 소주 5병 속에 담긴 인생과 좌절과 슬픔, 미련, 미래, 일상,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9월 23일(이날이 어떤 날인지 언론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침 1시간 30분간에 걸친 '친구 최진실'의 눈물마저 말라버린 가녀린 희망과도 단절한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내 슬픔이 '친구 최진실'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장례식장에서 유족인 최진영은 눈물을 흘리며 내 등을 때렸다. "형! 형은 누나의 최후의 보루였잖아. 누나는 항상 형만 있으면 든든하다고 말했어. 근데 이게 뭐야! 어떻게 누나가 죽어! 최후의 보루가 지켜줬어야지. 이게 뭐야!"라며 오열했다. 그랬다. '최후의 보루'였기에 지켜줬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 뿐이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래도 이 말은 해야할 것 같다. 10월 1일 밤 그녀가 소리쳤던 이 말을 전해야 할 것 같다.

"그래, 사랑을 해라! 사랑을 해! 이 지랄들아!"라는 푸념섞인 선언을 말이다. 누구를 두고 한 말이냐고?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닌 듯 하다. 죽어놓고서도 "오빠! 나 사고쳤어!'라는 환청으로 다가오는 '친구 최진실'이 알고 있고, '최후의 보루'였던 내가 알고 있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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