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두 장의 음반 녹음과 프로듀싱으로 정신없이 바빴고 음반 모니터링과 믹싱작업을 하는 동안 귀와 정신은 혹사당했다. 눈 깜짝 할 사이 일년이 지나가 버렸다. 지난해 만큼 음악을 특히, 재즈를 덜 들었던 때가 있었나 싶다.얼마전 느닷없는 폭설에 예정된 스케줄은 모두 취소돼 이틀 동한 휴식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거리는 한산했고 창밖은 온통 눈이었다. 작업을 멈추고 흩날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음악속에 푹 빠져들었다.지난 한해에 발매된 재즈앨범 중 인상적인 몇 장의 음반들을 정리해 본다.Fred Hersch & Esperan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에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했던 시절. 헤비메탈 음악이 권좌에서 밀려나며 락음악 씬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 즈음 나는 방에 틀어 박혀 작곡에 몰두하고 있었다. 잘 알 순 없었지만 무언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카피밴드는 의미가 없었다. 오리지널 곡을 써야만 했다. 당시 내가 연주하던 스래쉬메탈 Thrash Metal은 각 악기마다의 테크닉이 상당해 웬만한 실력으론 연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곡을 쓴다는 건 더욱 고난도의 일이었다. 그에 비해 너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티브이와 라디오가 전부였던 때가 떠오른다. 방송을 듣다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공테이프에 녹음하던 시절. 한 곡 한 곡 꾹꾹 눌러 담곤 했다. 디제이의 멘트가 들어가고 후주가 잘리는 게 대부분이었지만.데크가 두 개인 카세트 플레이어가 나오면서부터는 좀 더 다양한 음악을 담을 수가 있었다. 앞 뒷면을 꽉 채우고 노래 제목을 꼼꼼히 적어 나만의 노래 모음집(Mix-Tape)을 만들었다. 내게 없는 음반은 친구들에게 빌렸고 서로 음반을 공유하기도 했다. 나의 취향과 마음을 은밀하게 담은 모음집을 친구나 연인
가을이다. 봄과 여름이 청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중년의 계절일 것이다. 더불어 세월에 무르익은 재즈음악이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선선해지는 저녁이면 헤드폰을 쓰고 집근처 바닷가로 산책을 간다. 산책을 위한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꼼꼼히 챙김은 물론이다. 나이가 들수록 복잡하고 난해한 연주보다는 단순하고 섬세한 연주를 좋아하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지를 구현하고 공간을 넓히는 연주말이다. 기타리스트로 치면 조패스 보다는 짐홀이고 마이크 스턴 보다는 빌 프리셀이다.드럼 연주는 스틱보다는 브러쉬 연주가 좋다. 스네어를 강하게
영화 의 주인공 '길 펜더'는 소설가를 꿈꾸고 예술의 도시 파리를 동경한다. 연인과의 파리 여행중 사소한 다툼 끝에 밤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자정이 되자 종소리가 울리며 오래된 클래식카가 나타난다. 그 차가 향한 곳 황금시대인 1920년.환상적인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들른 카페에서 'Let's Fall in Love'가 흐른하. 고개를 돌려 무대를 보니 콜 포터가 노래하고 있다. 길은 놀라면서도 어느 순간 이런 상황들을 즐긴다. 그곳에서 헤밍웨이, 피카소, 피츠제랄드 등을 만나고 그들과 삶을 이야기하고 문
수업이 끝나자 마자 소년은 강둑을 향해 달렸다. 숨을 헐떡 거리며 색소폰을 꺼내곤 쉬지 않고 연주한다. 비가 와도 눈이 내려도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오늘도 땀범벅이 된 채 소년은 중얼거린다."난 세계 최고의 재즈 연주자가 될거야!" 이시즈카 신이치의 작품 만화 는 평범했던 소년이 재즈에 대한 열망을 안고 프로 연주가로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주인공 미야모토 다이는 중학교 시절, 우연히 가게 된 재즈클럽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색소폰 소리에 감동한다. 그 이후
'재즈 보컬'하면 루이 암스트롱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가 가진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와 스캣, 선명한 트럼펫 사운드는 '재즈 그 자체'임이 분명하다.하지만 스윙시대인 30년대에는 빅밴드의 화려한 연주에 밀려 보컬은 그다지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빅밴드가 해체되고 캄보 위주의 소규모밴드가 유행하자 대중들은 가사가 있는 보컬 재즈를 찾기 시작했다.그리곤 재즈계의 3대 디바라 불리우는 빌리 홀리데이와,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에 이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더불어 프랑크 시나트라, 토니 베
1995년, 그 해엔 기억할 만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군대 영장이 날아들었고 다니던 대학은 휴학했다. 활동하던 밴드는 잠정 해체를 했다. 새 일렉 기타를 갖게 됐고 멋드러진 태광 오디오가 생겼다.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자 하루종일 기타를 쳤다. 그러다 지루해 지면 오디오로 음악을 틀었다. 평범하고 수수한 날들이 계속 됐다.주방을 개조한 나의 방은 낮에는 죽은 듯 늘어졌다 밤이 오면 갑자기 활기를 띄었다. 옅은 조명과 빨간색 촛불, 진득한 블루스 음악이 흐르는 뮤직바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면 기타를 놓고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고
뉴밀레니엄을 맞아 전 세계가 떠들썩하던 1999년이었다. 10여년을 함께 했던 메탈 밴드의 드러머가 갑작스런 탈퇴를 선언했다. 밤을 새워가며 새로운 경향의 메탈 음악들을 연구하고 녹음하던 중이었다. 충격이 컸다. 도저히 납득이 안돼 이유를 물었다.- 음...이제는 재즈가 하고 싶어서.뭐? 재즈? 저녁이 되고 나는 용두암 근처의 음악전문 감상실 '파블로'로 향했다. 새우깡에 맥주 두어 병을 마시고는 사장님을 향해 외쳤다."가장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영상 좀 틀어주세요!"멋드러진 백발을 자랑하는 사장님은 빙그레 웃으며 당시로선 희귀한 L
한 달전 오른쪽 어깨에 갑자기 통증이 일었다. 기타를 치는 사람들이 으레 겪는 직업병이 있다. 그중 하나인가 했는데 왠걸 일명 ’오십견’이라 불리우는 유착성 관절낭염이었다. 정말이지 딱 50살이 되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녀석이 찾아온 거다. 생활하기엔 그리 불편하진 않지만 문제는 밤이었다. 조금만 뒤척여도 통증 때문에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음악을 틀어놓고 잠을 자는 게 오랜 습관인데 녀석이 찾아온 후론 신경이 예민해졌나 보다. 선율이나 리듬이 조금만 자극적이어도 잠에서 깨버리기 일쑤였다. 어쩔 수 없이 평소 듣던 음악 말고 다른
록 기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핸드릭스Jimi Hedrix는 몬트레이 팝페스티벌에서 자신의 기타를 불태우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블루스를 기본으로 피드백과 드라이브 등 갖가지 효과를 이용한 거친 싸이키델릭 사운드로 기타씬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보다 몇 년 전인 1966년 에릭 클랩튼은 슈퍼 락밴드 크림Cream을 결성한다. 10여분이 넘는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즉흥연에 관중은 열광했다.마초적인 아메리칸 하드록의 전형을 모여줬던 모터헤드Motorhead나 'Smells Like Teen Spirit" 으로 새
내가 밴드 공연을 처음 본 건 1992년 봄이었다. 제주시 원도심에 위치한 중앙성당에서였다. 친구가 기타리스트로 있던 밴드 의 단독공연이었다.장미꽃 한 송이를 사들고 아카데미 극장 옆 붉은 벽돌담을 지나 성당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소극장에는 철제의자가 줄을 맞춰 촘촘히 놓여 있고 잠자는 듯 숨죽인 무대를 노란색 조명이 아스라히 비추고 있었다. 조명사이로 드럼, 기타, 베이스와 커다란 스피커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 아! 정말이지 눈이 부셨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앞으로 펼쳐질 음악들
또 한 해가 지나간다.'세월은 흐르는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내가 경험한 삶의 모습과 감정들이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기를 소망한다.전 세계에 불어 닫친 전염병과 급격한 기후 변화로 지구가 흔들리고 있다. 위기의 시간에도 음악은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며 각각의 의미를 전했다.올 한 해 인상 깊게 들었던 몇 장의 음반들을 이야기하며 2022년을 마무리 해본다.재즈의 명가 '블루노트'에서 기획한 레너드 코언 트리뷰트 앨범이다. 조니
어떤 방식으로 가사를 쓰냐는 기자의 질문에 밴드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은 이렇게 대답한다."가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중요한건 멜로디죠. 멋진 멜로디만 있다면 어떤 가사를 붙여도 다 어울리니까!”그렇다. 멜로디의 힘은 강하다. 우리는 가사가 없는 연주 음악들을 때 혹은 낯선 언어의 노래를 들을 때 화성과 멜로디만으로도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그것이 바로 음악의 본질이고 힘인 듯하다. 하지만 가끔은 멜로디를 잊게 만드는 노랫말들이 있다. 일테면 글만으로도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그런 곡들 말이다.낯선 언어는 불투
밤거리에 차가운 공기가 깔리기 시작한다. 옷장 깊숙이 넣어둔 갈색 가디건을 꺼내 입곤 바닷가 옆 작은 선술집을 향해 걷는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시원한 맥주를 부르듯 '가을'이라는 말과 함께 오는 쓸쓸함은 막걸리와 와인을 부른다. 더군다나 이렇게 찬바람이 불어오는 절기엔 굴과 전어회, 꼬막과 과메기가 곳곳에서 술꾼들을 유혹한다. 계절에 따라 제철음식이 있듯이 이맘 때 역시 듣기 좋은 '제철 음악'들이 있다.이 계절의 제철 음악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반은 Gerry Mulligan Sextet의 63년도 앨범
가을이 오자마자 가장 먼저 계획한 건 차박(캠핑)이었다. 겨울과 여름엔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지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이 맘때는 얇은 이불 하나에 미니 테이블, 랜턴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 거기에 음식과 술 그리고 영화 한 편과 한 권의 책을 더하면 금상첨화다.집 근처 한적한 바닷가 포구 주변에 차를 세우고 실내에서만 지내는 일명 '스텔스 차박’을 할 예정이다. 밖에서 보면 좁디 좁은 공간에서 뭔 궁상을 떠나 싶기도 하겠지만 다락방처럼 자그마한 공간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이 좋다. 그래서 나는 이 캠핑을 “다락방 캠(핑)"이라
음악의 탄생과 발전 과정을 보면 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스페인의 플라멩코, 쿠바의 맘보 등 각 나라의 민속음악은 모두가 춤을 추기 위한 리듬을 원류로 한다19세기 말 미국 델타 지역의 블루스맨들은 기타 한 대를 들고 ‘조인트Joint’라 불리우던 선술집을 순회하며 연주했다. 관객들을 자극하고 춤을 추게 만들어 팁을 받아야 했기에 목소리는 거칠어 졌고 음고는 높아졌으며 한 대의 기타에서 풍성한 사운드를 낼 수 있는 테크닉이 개발되었다. 또한 반복되는 악구(Riff)가 음악의 중요한 요소가 되
아침엔 그나마 서늘하더니 오후가 되자 더운 공기가 방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선풍기가 열심히 돌아가곤 있지만 후덥지근한 바람 뿐이라 에어컨을 틀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다.그러다 며칠 전 써놓았던 짤막한 연주곡에 가사를 붙여 볼까하고 노트를 펼쳤다. 근사한 무언가가 떠오르길 기대하며 휘트먼 시집을 읽어보기도 하고 영감을 자극하는 사이키델릭한 영상도 틀어 놓았건만 썼다 지웠다만 반복할 뿐. 결국 펜을 놓고 말았다.ᅠ누군가 내게 '가사쓰기'와 '곡쓰기'중 무엇이 더 어렵냐고 묻는다면 "작곡은 내면의 에너지를 끌어 올려 창작의 쾌
클럽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과 맥주 한잔을 하게 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기타리스트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누군가요?"난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저요! 전 저를 제일 좋아해요."그러면 다들 깜짝 놀라며 헛웃음을 짓거나 민망한 듯 살짝 시선을 피한다. 물론 '거침없이 당당한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의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전혀 실없는 얘기는 아니다.세상엔 닮고 싶고 맘속 깊은 곳에서부터 경외심을 품게 하는 음악가들이 너무 많다. 오늘만 해도 80살의 행크 존스가 연주하는 미니멀한 선율
그 시절 삶의 유일한 탈출구는 스크린 속이었다.월요일 아침이면 신문 귀퉁이에 있는 영화 시간표를 스크랩하고 개봉 날짜를 꼼꼼히 메모했다. 그리곤 주말을 기다려 영화관을 찾았다. 중학생이었던 90년대는 헐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홍콩영화가 붐이었다. 극장마다 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하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들지만) 단관개봉 시절이었다.코리아극장과 푸른극장, 동양극장이 있던 칠성통과, 아카데미 극장이 있던 한짓골 일대를 싸돌아 다녔다. 상영관은 매캐한 담배연기와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눅눅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어둠속을 더듬어 두툼한 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