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도랭이 물’ 또는 ‘도랭이 못’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물이 귀했던 시절, 마을의 식수원(食水源)인 샘터다.

산골에서는 이 샘터 드나들기가 아득했다. 물 한 허벅(동이) 길어 나르는 일이 한 나절 넘었다.
열예닐곱 오누이가 물을 긷고 멀리 산골 마을을 오르고 있었다. 한참 등성이를 오르던 누나가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봤다. 남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물 허벅을 부려놓고 왔던 길을 내려갔다. 한참을 헤매다가 바위에 널브러진 동생을 발견했다. 바위에 '거시기'를 꺼내 스스로 돌멩이로 짓이겨 죽은 것이다.

앞서 오르던 누나의 하얀 종아리와 엉덩이를 보다 음심(淫心)이 발동했고 욕정이 솟구치자 부끄러움에 자책하여 죽음으로 스스로에게 벌을내린 것이다.

누나는 퍼질러 앉아 “겅 헐꺼민 도랭이라도 허주게(그렇게 할거면 달라고라도 해야지)”, 가슴 치며 통곡했고 그 눈물로 하여 그곳이 샘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도랭이 물’이다. 전해 내려오는 지명유례다.

엉뚱하게 ‘도랭이 물’ 전설을 끌어들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전설속의 남동생 이야기가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김수창의 길거리음란행위’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남동생은 음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자책하여 죽음을 택했다. 너무 가혹한 자기 처벌이다.
그러나 ‘길거리 음란행위‘는 우선 거짓말로 시작하여 변명으로 국면을 호도하려 했다.
이제 와서는 ‘성적 질환’이라는 이름으로 성적 동정심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소리도 나온다.

설마 하던 사건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여론은 그가 검찰조직을 죽이고 가족까지 죽였다는 비판이 거셌다.

검찰에 대해서는 기금까지의 ‘검사 성 스캔들’시리즈까지 모아 “검찰이 불의와 부정을 바로잡는 사정기관(司正機關)이 아니라 사방에 정액을 쏟아내는 사정기관(射精機關)아니냐”는 낯 뜨거운 질책이 쏟아졌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 욕구에서 찾았다. 성적 충동이 인간의 심리현상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는 것이 프로이트 심리학의 출발이다.

생물학에서도 인간과 동물은 성적욕구를 가진 존재로 정리하고 있다. 식욕과 같은 성적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성적 욕구나 성적충동은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나무랄 일이 아니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37세 이후 항구적인 금욕생활을 맹세하고 극기를 지향하는 제1보라고 했던 간디도 31세까지는 성적 충동과 욕구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자서전에서다.

조선시대만 해도 권세가문에는 ‘웃방 아기’를 들였다고 한다.
양기(陽氣)를 잃은 늙은이가 젊은 여자의 기(氣)를 쐬기 위해 사춘기 동녀(童女)를 잠자리에 들였다.
나이가 들면서 떨어지는 성기능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노화가 결코 인간의 성적 욕구를 꺾지 못한다는 킨제이보고서도 있다.

그러기에 건강한 사람이 성적 욕구나 성적 충동에 반응하는 것이 죄일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배출하고 억제함에 있어 동물적 본능에 따를 것이냐 학습된 이성에 의지 할 것이냐에 따라 사회적 인식이나 평가가 달라질 따름이다.

동물은 수치를 모른다. 암캐 수캐가 천연덕스럽게 길거리든 어디서든 본능에 따라 그 짓을 하는 것도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왁자한 동물원에서 원숭이가 뒤 부은 핑크빛 엉덩이를 흔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로 미뤄 대로변에서 '거시기'를 꺼내 다섯 차례나 그 짓거리를 했던 ‘길거리 음란행위’는 동물적 본능에 따른 것인가. 학습된 이성에 의지한 것인가.

‘길거리 음란행위’를 성도착증의 하나인 노출증일수도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다. 성적 정신질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다 해도 너무 놀랍다. 지금까지 정신 질환자에 의해 불의와 부정이 다스려지고 법과 양심과 정의를 위한 사정의 칼날이 휘둘러졌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가 수사하고 기소하고 처리했던 사건이 정상이 아닌 ‘병적 판단’에 의해 이뤄졌다면 여간 큰 일이 아닌 것이다.


"평소 심한 스트레스와 성적억압을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거나 "성적 욕구의 배출구가 제한적인 고위공직자의 욕구불만에 따른 일시적 이성 상실"이라는 등등의 요사스런 요설(饒舌)로 사건을 물 타기 하려는 조짐이 보인다.

그렇다고 그의 음란행위가 긍정적으로 이해 받을 수는 없다. 검찰에 씌워진 불신의 굴레가 신뢰의 목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뼈를 깎는 검찰내부의 자정노력과 혁명적 수준의 제도개혁을 통해 검찰이 다시태어나지 않는다면 검찰이 사정기관으로서의 신뢰회복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환관(宦官)처럼 판검사 임용자격 요건을 ‘거세(去勢)된 자’로 규정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지원자가 있을까. 검찰을 향한 사회적 조롱은 해학을 넘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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