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입니다. 상서로운 기운이 새 빛으로 일어서고 있습니다.

설날은 새로운 날입니다. 설날의 ‘설’은 ‘낯설다’ 또는 ‘설다’의 뜻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나면 ‘낯설다’고 느껴지듯이 ‘설날’ 역시 낯설어 새롭게 느껴지는 새로운 날입니다.

‘낯설다’와 ‘새롭다’는 그래서 음은 다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나 다름없습니다.

민족전래 고유 명절인 설날은 그래서 새롭게 출발하는 일 년의 새날인 셈이지요.

차례를 지내며 조상의 음덕(蔭德)을 기리고 웃어른을 찾아 세배 드리는 설날 풍습은 숭조(崇祖)사상과 노인 공경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친척과 친지들과의 덕담을 나누는 교유(交遊)는 화목한 생활 공동체의 자양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설날 덕담 키워드의 열에 아홉은 복(福)에 관한 것입니다. ‘복을 많이 받으시라’는 것이 기본 컨셉입니다.

건강과 부와 명예와 권력욕 같은 본성적 욕구나 희망사항이 덕담의 이름으로 표출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욕구 본능의 주머니라 할 수 있는 ‘복’이란 무엇일까요.

혹자는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보다 많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건강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사람이 갖고 있는 욕구가 충족되어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기분이나 상태가 행복’이라는 사전적 풀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으로 이야기되는 물질적 욕구 충족은 만족이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과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조건’을 물질적 구체적 풍요가 아니고 정신적 또는 감정세계에서 찾고 다듬어야 한다는 사회심리학의 주장도 없지 않습니다.

일찍이 칸트는 인간 행복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열심히 일하는 것이고 다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물질적 충족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20대에서 90대까지 268명의 건강 상태 연구를 42년간 이끌었던 하버드대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정신의학과 전문의)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특권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사랑을 통해서 온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칸트가 말한 ‘행복의 조건’과 일맥상통하는 임상연구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빈곤을 걷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되레 불행일 뿐입니다.

성서에도 마음을 비우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구하는 사람, 애통하고 남을 가엽게 여기는 사람을 일러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저울에 달아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인용하자면 행복과 불행은 저울추 눈금 하나의 차이일 뿐입니다.

아주 작은 것으로도 행복과 불행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설날의 덕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란하게 입 발린 큰 말씀보다 작지만 소담스럽고 부드러운 진솔한 이야기에서 가슴은 보다 따뜻해 질 것입니다.

설날 아침, 당신의 ‘복주머니’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요. 당신은 무엇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권력입니까, 사랑입니까, 의로움입니까, 배려입니까, 아니면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입니까.

이규경의 ‘사랑의 시’가 마음으로 성큼 다가서는 설날 아침입니다.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

이 세상에 행복보다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만족이다

큰 행복이라도 만족이 없으면 불행하고

자주 작은 행복도 만족이 있으면 큰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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