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없다. 원칙도 없다. 객관성과 공정성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는지 찾을 길 없다.

완장 찬 권력 졸개들의 ‘앞으로 가’만 있을 뿐이다.

권력이 부끄러움을 모르니 후안무치(厚顔無恥)일 수밖에 없다.

공천권을 놓고 벌이는 집권여당의 이전투구(泥田鬪狗)는 그래서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짜증만 주고 있다.

새누리당 최고위원들의 공천 갈등과 공직후보자추천관리위원회(공관위)의 무소불위(無所不爲)가 촉발한 공천권 싸움에 국민은 이미 흥미를 잃어버렸다. 식상해 버린 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와 증오심만 키울 뿐이다. 인내의 한계점을 넘어선지 오래다.

진행되는 공천과정의 말들을 종합해보면 여당의 공천은 막장드라마다. 부끄러운 곳까지 발가벗었다.

당 대표가 지적한 대로 공천은 공정성을 잃었다. 정권에 밉보인 인사들에게 내려친 보복성 칼바람은 치사하고 무자비했다.

하자가 없고 상당한 수준의 지역 유권자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현역의원에 대한 경선 참여 기회 박탈은 그 대표적 예다.

여론조사 1위를 끌어내리고 거기에 2위를 단수 추천 한 것도 기준도 없고 원칙도 없는 공천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역구에서 높은 지지도를 받아 당선가능성이 높은 원로 의원을 단지 정권에 쓴 소리 한다고 탈락시켜 버렸다.

친박에서 멀어졌다고 원내 대표까지 지냈던 중진의원을 당의 정체성 운운하며 공천카드를 갖고 목을 조르는 공관위의 해괴망측한 ‘망나니 수준 칼 춤’은 일그러진 정권의 화장기 지운 맨 얼굴을 보는 듯 섬뜩하다.

기준도 원칙도 객관성도 공정성도 보이지 않는 ‘미운 놈 죽이기’ 공천 학살은 정치적 테러행위다.

테러는 존엄의 결핍에서 나온다. 정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비정상적 권력 골수분자들의 막가파식 공격이다.

소수의 반대자나 비판자를 포용하지 못하는 용렬하고 옹졸함으로 어떻게 거대 대한민국호의 키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태산(泰山)이 높고 큰 것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고 껴안은 탓이며 하해(河海)가 깊고 푸른 것은 가는 물줄기도 밀어내지 않고 품었기 때문’이라 했다.

중국 전국시대 달변가 이사(李斯)가 옳은 소리하는 신하를 내치려는 왕을 향한 설득논리다. 지도자의 대범한 포용력을 주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을 쥐고 있는 현 정권이 새겨들을 경구나 다름없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여당의 공천 작업은 ‘꼭두각시놀음’이다. 꼭두각시놀음은 뒤에서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이래저래 소문으로, 눈치로, 느낌으로 다 알고 있다. 다만 알려진 비밀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니, “청와대 마음에 들어야 환생한다”는 뜻의 ‘청심환(靑心還)은 청와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청와대 조종에 의해 공관위가 움직이고 있고 공관위원장은 그 막강한 권력의 힘을 업고 ‘조자룡의 헌칼 쓰듯’ 주군을 위해 칼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칼춤은 현란하다. 창칼쓰기의 기법이나 초식은 한 참 벗어났다. 닥치는 대로 쳐내고 달릴 뿐이다.

찍힌 사람은 추풍낙엽처럼 그의 칼 아래 쓰러진다.

자신에게 임명장을 준 당 대표를 향해 ‘바보같은 소리’한다고 힐난하지를 않나, 공관위가 결정해야 할 일을 이해 당사자가 결정하라는 식의 상식이하의 야비하고 무례한 갑질 행진의 백그라운드가 어딘지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왜 이렇게 ‘친박당(党)’에 무리수를 두고 있는가. 이러한 권력의 오만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집권후반기 레임덕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감 때문이라는 일각의 분석도있다.

뭔가 이뤄내야겠다는 정권 성과물의 절박감과 조급성도 이와 무관하지가 않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민주정당의 구조를 위협하고 유린하려는 그림자 권력 행사는 옳지 않다. 독재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자칫 정권 실패의 부메랑이 될 수 있고 정권에 씻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오죽해야 당 대표의 입에서 공천과정과 관련 ‘독재적’이라는 거친 말이 나왔겠는가. 의미심장한 임팩트가 아닐 수 없다.

‘권력은 부패하기 쉽다.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들도 압력을 행사 할 때는 거의 사악한 법‘이라는 말이 있다. ’액턴의 법칙’이다.

19세기 대표적 역사학자 액턴이 했던 말이다. 집권여당의 공천권력 놀음을 보면서 떠올랐던 경구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집권여당이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지고 지리멸렬(支離滅裂) 상태인데도 자정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이물질을 걸러내는 정수장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당의 원로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가. 최고위원들은 또 어떤가. 제밥 그릇 지키기에만 여념이 없다. 제 정신들인가.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거친 말을 하자면 그들은 판단력과 정의감과 중재력을 거세당한 허수아비로 밖에 볼 수 없다.

정신적 정서적으로 거세당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도 못하는 내시들의 굴신(屈身)을 보는 것 같다.

어느 쪽 눈치만 보며 제 보신에만 연연하는 비겁하고 비굴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집권여당만이 아니다. 야권도 마찬가지다.

‘이삭줍기 공천’이니, ‘넝마주의 공천’이니, 별 희한하고 한심한 작태가 끊이질 않고 있다.

적대적 관계의 당에서 쳐낸 인사를 영웅 모시듯 영입하는 등 정체성을 말하면서 정체성을 짓밟아 버리는 놀라운 정치적 이합집산도 서슴지 않고 있다.

부부를 맞바꾸며 그 짓하는 ‘스와핑 정치’나 악취풍기는 ‘하수구 정치’를 보는 것 같다는 독하고 엽기적인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런 식의 ‘최악 20대 공천‘이라면 ’최악 19대 국회‘ 못지 않게 ’20대 국회‘ 역시 ’최악 수준‘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유권자인 국민이 더욱 눈을 부라리고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최악을 걸러내려는 유권자의 현명한 판단과 능력을 발휘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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