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모자를 쓴 노인들이 한두 명씩 들어섰다. ‘삼계탕 집’이었다. 40석 좌석의 식당 안은 빈자리가 없었다.

82세에서 92세까지 노인 34명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 해병대의 상징이자 산 증인으로 일컬어지는 해병 3~4기 예비역 해병들 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제주출신 학도병이 주축이 된 해병 3~4기의 혁혁한 전과(戰果)기록은 세계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 시켰던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등은 세계 해전 역사에 영원히 남을 승전보(勝戰譜)다.

‘귀신 잡는 해병’은 그렇게 해서 얻은 별명이다.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해병의 긍지와 명예를 드높이는 빛나는 이름인 것이다.

 

연일 30도 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 5일에도 예외 없이 ‘가마 솥 더위’였다.

찜통더위 속 노(老) 예비역 해병 34명이 자리를 같이 한 것이다.

제주 해병 3~4기 전우회 대의원 들이었다. 한국 최초의 여 해병이었던 예비역 제주여성 해병 3명도 함께 였다.

정상적인 거동도 버거울 연치(年齒)였다. 그런데도 옛 전우들이 더위에 아랑곳없이 뭉친 것이다.

무더위 피서 보양식의 하나로 알려진 ‘삼계탕 파티’에 초대받아서다.

'열(熱)은 열(熱)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섭생(攝生), ‘삼계탕 파티‘.

사연은 이렇다.

현재 생존해 있는 제주출신 해병 3~4기 생은 600명 남짓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날은 마침 ‘제주해병 3~4기 전우회’ 대의원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를 안 박기남 제주서부경찰서장이 이들을 초청하여 삼계탕을 대접한 것이다.

박서장의 아버지는 해병 4기 출신이었다. 박순도 해병. 한국전쟁 출전 당시 16세 나이였다.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다.

박 해병은 제대 후 전쟁에 의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30대 중반의 나이었다. 박서장이 두 살 때였다고 했다.

박 서장은 아버지 없이 자라면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전쟁의 아픔을 간접 체험했다.

그러면서 10대에 위기의 나라를 구하겠다고 자원입대 한 아버지와 해병을 직간접적으로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이날 박서장이 원로 예비역 해병들을 모시고 ‘삼계탕’을 대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선을 넘나들며 함께 피땀을 흘렸던 아버지의 옛 전우들에게 마음에 우러나는 한 끼를 대접하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을 터였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를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혈서를 쓰며 펜 대신 총을 들어야 했던 10대 소년 학도병들이 없었다면 조국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들의 마음을 아는 이 몇이나 될 것인가.

원로 예비역 해병들에 대한 ‘삼계탕 한 그릇 봉사’는 그렇기 때문에 돋보일 수밖에 없다.

마음 씀씀이가 그렇다. 작지만 정성을 담으면 보다 넉넉해지고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옛 전우의 젖먹이 아들이 장성하여 경찰서장이 되고 아버지의 옛 전우들을 초청하여 한 끼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번 원로 예비역 해병들을 초청하여 삼계탕을 대접하는 일은 작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서는 아름다운 정경임에 틀림없다.

이날 자리에 함께 했던 김유헌 해병전우회 중앙회 부총재도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임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행사’라고 고마워했다.

다른 원로 예비역 해병들 역시 흐뭇해했다. 얼굴에는 대견하고 고마운 표정이 역력했다.

박서장도 마찬가지다. “말로만 듣던 아버지의 옛 해병전우들에게 한 그릇 삼계탕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데 매우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하는 두 살 박이가 성장하여 지역 치안 책임자로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버지와 아버지 전우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준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삼계탕 한 그릇의 정성’은 이렇듯 의미가 심장했다.

흐뭇하고 감사하고, 즐겁고 우쭐하고, 그런 노 해병들의 ‘삼계탕 파티’였다.

마침 오는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승전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작전에 주도적으로 참전했던 제주의 해병 3~4기생들에게는 더욱 감회가 새로워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성황리에 개봉되고 있다.

문득 “제주해병 3~4기 원로 해병들에게 당시를 회상하며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영화 인천상륙작전 단체 초대권을 내어줄 독지가는 없겠는가?”, 실없는 상상을 해본다.

참고로 박기남(49)제주서부경찰서장은 경찰대학 법학과와 영국 엑시터 대학교 대학원을 나왔다.

1990년 경위로 임용된 후 2011년 총경으로 승진하고 2013년 미국뉴욕 총 영사관 해외 경찰 주재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었다.

제주도경 수사과장 등을 거쳐 최근 제주서부경찰서장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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