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 광대한 카펫에 팝콘을 뿌려 놓았을까?

햇빛 쏟아지는 푸른 등성이에 내려앉아 빤짝이는 성긴 눈발을 보는 듯 눈이 시리다.

한라산 자락인 제주도 오라동 지경 노루손이오름과 열안지오름 어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25만여평의 광활한 면적에는 시방,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가을 햇살이 눈 부셨다.

소슬 바람을 타고 출렁이는 메밀꽃 물결은 그래서 더욱 꽃 멀미를 일으키듯 몸살이 났다.

거기에다 제주시내 빌딩 너머 푸른 바다가 아스라이 눈에 잡혔다.

장관이었다. 현란했다. 낮에 나온 팔월 초아흐레 반달도 그 현란함에 놀라운 듯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는 것 같았다.

지난 금요일(9일)오후, 지인의 권유로 찾았던 한라산 자락의 메밀 꽃 밭은 경이로움 자체였다.

한참을 혼자 중얼거리며 취한 듯 메밀꽃 오솔길을 걸었다.

‘아, 그랬었구나’.

문득 이효석(1907~1942) 단편의 걸작 ‘메밀 꽃 필 무렵’이 떠올랐다.

소설 속 주인공, 장돌뱅이 허생원과 봉평 마을 성서방네 처녀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의 배경도 ‘흐르는 달빛과 하얗게 핀 메밀꽃’이었기 때문이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속 배경 설명이 그랬다.

장돌뱅이 허생원의 살 떨리는 기막힌 ‘하룻밤 사랑’의 배경이 메밀꽃이었다면, 이 광활하고 눈부신 제주의 오라 메밀꽃 물결은 어떤 사랑이야기와 추억을 만들어 낼 것인가.

그래서인가, 메밀꽃의 ‘꽃말’은 ‘연인’과 ‘사랑’이라고 했다.

‘연인들의 사랑을 나누는 꽃밭’이란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 봉평을 메밀산업의 메카로 키운 힘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막국수, 냉면, 묵, 만두, 전병 등 다양한 식재료인 메밀의 주산지가 강원도 봉평으로 알려지고 있어서다.

‘메밀’하면 ‘봉평’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메밀꽃 필 무렵’의 후광 효과다.

그러나 메밀의 주산지는 제주다. 제주가 재배면적이나 생산량에서 부동의 전국 1위다.

2012년 까지만 해도 제주의 메밀재배면적이나 생산량은 전국의 절반을 차지했었다.

지난해의 경우도 제주가 전국 메밀 재배면적의 24.5%였고 생산량 역시 전국 생산량의 30%로 최대주산지다.

같은 기간 강원도의 메밀 생산량은 제주의 절반 수준에 불과 했다.

다만 제주산 메밀이 봉평에서 가공과정을 거쳐 ‘봉평 산’으로 둔갑하여 전국에 유통되고 있을 뿐이다.

전국 최대 주산지 제주메밀이 떳떳하게 자기 명함을 갖지 못하고 다른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는 것은 ‘희극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의 비애’가 오버랩 된다.

스토리텔링 등 메밀 문화 콘텐츠에서 밀렸고 가공시설 등 메밀 산업에 대한 정책 개발이나 지원에서 서자 취급을 받아왔기 때문이 아니던가.

정책부재가 낳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과감한 정책추진과 투자 지원 등 현실적 제주 메밀산업 육성 프로그램 운영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아도 도가 ‘제주메밀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기는 했다.

제주메밀 산업의 체계적 육성과 관광산업과 연계한 6차산업화 추진, 생산과 가공시설 기반 구축과 현대화, ‘제주메밀의 날’ 지정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계획을 위한 계획뿐이었다. 추진동력이 가동되지 않고 있어서다.

‘허명의 문서‘가 되어 버렸거나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했다.

제주에서 갖는 메밀의 상징성은 크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꽃과 열매를 잘 맺는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삶을 개척해온 제주인의 특질이나 기상과 닮았다.

메밀은 제주의 문화와 전통에 녹아 흘러 제주인의 삶을 엮어 왔다.

메밀떡, 빙떡, 묵과 범벅, 수제비를 비롯한 관혼상제 음식 등 독특한 향토음식 재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신화 속 제주메밀은 옥황상제가 오곡백과 씨앗 중 ‘자청비’에게 내려준 제일 마지막 씨앗으로 전해지고 있다.

자청비는 자식 없는 늙은 부부가 부처님께 발원하여 얻은 외동딸이었다.

재주와 미모를 겸비했다.

자청비는 제주의 여신 중 ‘미의 여신’, ‘농경의 여신’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남장을 하여 옥황상제의 아들 문도령과 동문수학하다가 목욕 중 여성으로 밝혀졌고 결국 문도령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늘과 땅의 사랑’이었다.

그러다가 문도령이 하늘로 올라가버리자 자청비는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후일 하늘나라 반란 제압에 공을 세우고 옥황상제로부터 상으로 오곡백과 씨앗을 받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유독 메밀 씨앗만 없었다. 뒤 늦게 이를 안 자청비가 하늘로 올라가 메밀 씨앗을 가져왔다.

메밀이 파종 시기는 늦어도 생육이 빨라 다른 곡식과 비슷한 시기에 수확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했다.

제주와 메밀의 질긴 인연은 이렇게 신화 세계와도 얽혀져 있다.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메밀꽃 필 무렵’보다 훌륭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서 제주의 빼어난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여지가 충분하다.

메밀은 꿀의 원료가 되는 밀원(蜜源)식물이기도 하다. 제주의 메밀 꿀은 알아주는 강장건강식품이다.

그렇다면 꽃 멀미를 일으킬 정도의 현란한 꽃물결을 볼거리 관광자원으로 하여 메밀 식재료의 먹거리 산업, 강장건강식품으로서의 제주 메밀 꿀 상품화, 자청비와 문도령과 메밀이 얽혀진 하늘과 땅을 엮는 사랑의 문화 콘텐츠를 융합한다면 메밀은 충분한 제주의 6차산업 토양이며 자산이지 않겠는가.

다른 지역에 빼앗긴 제주 메밀의 명성을 다시 찾아와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라 벌 광활한 면적에 흐드러지게 일렁이는 메밀 꽃 물결에 취해 거닐다가 잠겨본 상념(想念)이다.

그 상념의 한 자락엔 ‘모멀 고장 벨라 질 소시’도 걸려 있다.

‘메밀 꽃 필 무렵’을 제주어로 풀어쓰자면 그렇다. 웃자고 해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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