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민중항쟁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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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민중항쟁을 이야기하자”
  • 김동현 책임 에디터
  • 승인 2017.04.2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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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정명(正名) 본격적 논의 계기, 70주년에는 백비 세워야
지난 4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제주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강연과 콘서트가 열렸다.@제주투데이

일본 도쿄 제주 4·3 69주년 추모모임 참석기

김동현 문학평론가

지난 22일 일본 도쿄에서 '제주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이 주최한 강연과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화가 박경훈 씨(현 제주문화재단 이사장)가 ‘민중항쟁으로서의 제주 4·3’의 의의에 대해서 발표했다. 또, 일본 현지에서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제주투데이에서는 일본 도쿄 제주 4·3 69주년 추모모임 참석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22일 일본 도쿄 닛포리 써니 홀. 500명 넘는 객석이 가득 찼다. 이날은 도쿄 제주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회장 조동현)이 마련한 제주 4·3 69주년 추모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후부터 잔뜩 흐렸던 날씨는 저녁이 되면서 갑작스러운 폭우로 변했다.

궂은 날씨였지만 일본에서 제주 4·3의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제주 4·3은 금기였다.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은 제주 4·3을 ‘성공한 토벌’로 인식했다. 민간인 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이야기했다가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

억압적인 한국사회에 비해 일본은 그나마 자유로웠다. 김석범 선생의 단편 <까마귀의 죽음>이 세상에 나온 때가 1957년이었다. 한국사회의 금단의 벽을 뛰어넘었던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발표된 것이 1978년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제주 4·3의 불씨는 남한의 억압체제에서 비껴난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제주 4·3 추념식을 처음 시도한 것도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지펴진 제주 4·3 진상규명운동의 불은 한국사회로 옮겨 붙었다. 도쿄 닛포리 써니 홀을 가득 메운 500여명의 관객들은 일본에서 제주 4·3진상규명 운동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였다.

여전히 '빨갱이' 프레임에 갇혀있는 제주4·3
이날 강연자는 제주에서 민중미술가로, 문화운동가로 30여 년을 치열하게 싸웠던 화가 박경훈 씨였다. 지금은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으로 있지만 이날 강연은 그가 이사장이라는 공식 직함 대신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 과정을 통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한 제주 4·3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자리였다.


한국어로 발표를 하면 통역(이령경 일본 릿쿄대학 겸임강사)이 자료 화면의 도움을 받아 그의 발언을 일본어로 옮겼다. 통역의 한계와 기술적인 문제로 일본 현지인들에게는 지루할 법도 한 강연이었다. 하지만 2시간 동안의 강연 동안 일본인들은 물론, 재일조선인과 제주에서 추모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그것은 제주에서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민중항쟁’이라는 정명(正名)의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박 씨는 먼저 ‘빨갱이’라는 키워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는 배제와 차별의 억압이 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했던 것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빨갱이’이라는 손가락질은 공포 그 자체였다. 소설가 이청준은 그 공포를 <소문의 벽>이라는 소설에서 ‘전짓불의 공포’였다고 토로한 바 있다. 툭하면 ‘종북좌파’라고 손가락질하는 보수 우익들의 버릇은 ‘빨갱이’라는 낙인찍기에서 비롯되었다. ‘빨갱이’이라는 단어는 ‘종북좌파’로 바뀐 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 나선 한 후보가 “‘좌파 후보’들이 돼서는 안 된다”고 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한 사회의 이념적 경직성은 심화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는 제주 4·3에서도 하나의 금기가 되었다. 매년 4월이면 중산간 이덕구 산전을 찾아 추모의 술잔을 올리는 이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항쟁 지도부의 ‘사상’을, 그들의 ‘정신’을 애써 무시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소위 보수 우익들의 ‘위패’ 시비였다.

화가 박경훈 씨(우)가 제주4.3에 대해 강연을 하고 있다. 통역은 이령경 릿쿄대학 강사(좌)가 맡았다.@제주투데이

"4·3은 항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박 씨는 제주 4·3진상규명특별법의 희생자 규정을 언급했다. 특별법은 희생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 등은 모두 희생자 후유장애가 남은 사람 또는 수형자(受刑者)로서 제3조 제2항 제2호에 따라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을 말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항쟁 지도부들의 위패도 모두 평화공원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은 희생자로 결정할 수 없다는 헌재 판결 이후 우리는 의도적으로 제주 4·3을 ‘무고한 희생’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다.(희생담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주, 우리 안의 식민지>에서 다룬 바 있다. 최근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연구서가 일본에서 출간되었다.)

박 씨는 “빨갱이라는 낙인을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으면 4·3의 정명(正名)은 이룰 수 없다”며서 “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한 32명의 위패까지 각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시각은 제주 4·3의 정명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지역 사회가 ‘항쟁’으로서의 제주 4·3의 의미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동안 제주지역 사회가 4·3의 정명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항쟁은 괄호 안에 가두어 왔다. 언어가 결국 존재를 증명한다고 할 때 이제는 본격적으로 제주 4·3 무장봉기의 성격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다. 무장봉기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을 등용한 미군정의 폭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저항권이라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박 씨의 설명이었다.

특별법 제정 당시 사건이 아닌 ‘항쟁’의 의미를 법 안에 담아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4·3을 ‘사건’으로 규정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한계가 낳은 타협의 산물이었다.

빨갱이라는 키워드로 시작해 위패, 무장봉기 등의 키워드로 제주 4·3의 이야기를 풀어간 박 씨의 강연을 들은 일본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강연에 참석한 김석범 선생은 “속이 다 시원하다”면서 “내년에는 반드시 백비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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