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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담론] 제주역사의 영웅들양영수/ 전, 제주대학교 교수, 소설가
제주투데이 | 승인 2017.09.12 20:21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제주역사에서 영웅을 찾는다면 어떤 인물을 꼽을 수 있을까. 담력 큰 제주해녀의 자손들이니까 영웅적인 인물들이 많이 나올 법도 하다. 끝이 안 보이는 망망대해, 그 거친 바다물결을 무섭다 하지않고 첨벙 뛰어들어 수십 길 깊은 심해 바닥에 숨겨진 생물들을 잡아올리는 일이란 생각만 해도 대담무쌍하다 할 것이고, 어린 시절 엄마의 장쾌한 물질 장면을 보면서 자란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용맹스럽고 겁 없는 행동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은가.

우선 제주신화에서 영웅을 찾는다면 차사본풀이에 나오는 강님을 들 수 있겠다. 열여덟 여자를 부인으로 거느린 영걸인 강님은, 아득한 저승세계로 내려가서, ‘어마어마한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염라대왕에게 ‘봉황새 같은 눈을 부릅뜨고 삼각수염 거스르고 구리쇠 같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우레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메어다 친 절륜한 담력의 소유자이다. 그 무서운 염라대왕으로 하여금 ‘두 주먹 불끈 쥐고 벌벌 떨’게 한 다음 자기를 따라 지상세계로 올라와서, 비명에 죽은 ‘버무왕 세 아들’에 대한 신원처결(伸寃處決)을 해주도록 청하는 것이다. 중국신화나 그리스신화처럼 전쟁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기 때문에 제주신화에 전쟁영웅이 없음은 당연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용사 이야기가 제주신화에 미미하게 나오지만 그것도 제주섬 바깥에 일이다.) 전쟁 아니고도 세상에 무서운 것이 사람 죽는 일인즉, 사람을 죽음으로 데려가는 염라대왕 앞에서 겁 없이 호통치는 강님을 제주신화 최고의 영웅으로 꼽아도 좋을 것이다.

제주섬의 인간역사에는 어떤 영웅이 있었을까. 제주역사에 전쟁영웅은 없었다 하더라도 폭압정권에 항거한 영웅들을 찾을 수는 없을까. 1901년 제주민란 때 이재수는 악랄한 세정(稅政) 비리에 용감하게 맞서 싸운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민란 초기에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던 민중이, 무참한 살상사건을 당하고 지도자가 잡혀감에 따라 흐지부지 흩어지려 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 장두로 나서는 이재수의 용기는 가히 영웅적이다. 27세 약관의 이재수가 선두에 나섬으로써 그를 따르는 민중이 구름같이 모여들었고 대정현에서 제주성안까지 벌떼처럼 쳐들어가는 매서운 기세를 보였다고 했으니 그의 비범한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정의의 투사 이재수가 일시적인 승리에 취해 오만에 빠졌는지 방자한 폭력을 불사하여 세정 비리의 하수인격인 천주교인 삼백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끝에 붙잡혀서 역적으로 처형당했으니 그의 영웅담은, 덕장(德將)은 아닌 용장(勇將)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김달삼은 1948년 4.3사건 때 남로당제주도당 총책이자 입산무장대 사령관으로서 좌익세력의 무장봉기를 지휘했던 인물인데 그를 시대의 영웅이라고 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의 독선적인 영웅심이 일을 낸 것은 무장봉기 한 해 앞서 3.1절 기념식 때부터이다. 그 당시 20세를 갓 넘긴 김달삼은 대정중학교 사회과 교사였는데, 교정에서 기념식을 마친 학생들을 선동하여 가두로 진출, 반미 시위를 벌인 그의 돌출행동에 대해서는 그 학교 교장도 몰랐다고 한다. 다음 해 4월 3일의 폭력항쟁 거사는, 신중론을 펴는 원로들을 물리친 김달삼이 당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가능하였다. 민족분열의 비극을 막기 위해 5.10총선거에 주민들 과반수가 거부하도록 유도했거나,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좌익무장대가 폭력경찰과의 싸움에서 썩 훌륭한 전과를 이루었음은 그의 비범한 카리스마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갈수록 더욱 의기충천해진 그의 다음 행보가 제주역사의 불행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해 8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공산당 정권 창출의 준비 단계인) 황해도 해주에서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한 김달삼은 자신의 인민해방 투쟁의 성과를 발표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고 35인 조선인민당 주석단의 반열에 올라선다. 이 사건이 함축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이승만 정권이 제주도 4.3사건을 폭력정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적화통일을 향한 조직적인 반란이라 규정하고 초토화라는 전면적인 소탕작전 방침으로 나오는 데에 그가 일조하지는 않았을까. 남침 기회를 노리던 김일성은, 제주도는 인민해방의 선진지역이라고 자신만만하게 공언하는 김달삼의 연설을 듣고 그의 전쟁의지를 더욱 굳히지는 않았을까. 김달삼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에서 고도의 게릴라전 훈련을 받은 후 남파되어 태백산지구 유격대 대장으로 작전 수행 중 6.25전쟁을 석 달 앞둔 시점에서 아깝게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만약에 김일성이 지령한 그의 게릴라 작전이 석 달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이 나라에 어떤 기막힌 역사가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해진다. 전쟁이 없기 때문에 싸움 잘하는 영웅이 필요없는 역사라면 분명 좋은 일이다. 불세출의 영웅을 배출하기 위해 전쟁이나 난세가 닥치는 것을 바랄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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