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11일), 서울의 아침은 영하 11도였다. 코에 고드름이 달릴 정도의 혹한이었다.

그렇게 혹독하게 추운 날씨에 동대문구 답십리 시장 앞 길바닥에 어떤 할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들은 못 본채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때 등굣길 중학생 3명이 할아버지를 보았다.

정효균, 엄창민, 신세현 군. 전농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백지장이었다. 손은 어름처럼 차가웠다. 숨소리도 들리는 등 마는 등이었다.

학생 중 한명이 할아버지 상체를 일으켜 자신에게 기대도록 감싸 안았다. 다른 학생은 자신이 입고 있던 패딩점퍼를 벗어 노인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할아버지를 등에 업었다. 인근 가게 주인이 알려준 할아버지 집을 찾아 무사히 모셔다 드렸다.

그대로 뒀다면 할아버지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들 중학생들의 선행을 들으며 문득 ‘착한 사마리아 인’ 이야기가 떠 올랐다.

기독교의 성경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유대인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그의 옷을 빼앗고는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당시 사회의 상류층으로 알려졌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못 본채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유대인으로부터 멸시와 배척당하는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다가가 상처를 응급 처치한 다음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사마리아인은 여관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강도당한 이를 돌봐주기를 부탁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다고 했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상징으로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관여하지 않고 지나쳐버리기 마련이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서도 내가 아니더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도와주겠지, 방관해 버리기 일쑤다.

이러한 심리 현상이 ‘방관자 효과’ 또는 ‘구경꾼 효과’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각박한 세태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길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등에 업고 집에까지 모셔다드린 중학생들의 선행 이야기가 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한파보다 더욱 혹독해지고 있는 각박한 세태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최소한 윤리적 도덕적 규범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을 보다 촘촘하게 엮어 보자는 뜻의 ‘착한 사마리아 인 법’을 만들자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오고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는 취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상황인데도 위험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 버리는 ‘구조 불이행’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른바 ‘구조 거부죄’ 또는 ‘불구조 죄’를 법제화 하자는 주장인 것이다.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상당수 국가에서는 이미 이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법과 도덕은 별개라는 입장에서다.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여 법이 도덕의 영역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물에 빠진 사람을 충분히 구해 줄 수 있는데도 구해주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도덕적으로는 비난 할 수 있어도 법적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인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건전한 사회통념상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적 덕목이다.

따라서 법으로 강제하여 구조를 거부한 사람을 처벌은 하지 않더라도 구조한 사람에게는 포상이나 보상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면 ‘착한 사마리아 인 법’이 추구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처벌보다는 보상위주의 ‘착한 사마리아 인 보상법’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적반하장이나 도움을 준 사람이 되레 피의자 또는 피해자가 되는 부정적 요소들을 차단하는 장치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시린 몸과 마음을 녹일 따뜻한 인정의 아랫목이 그리운 계절이다.

곤궁하고 외로운 처지의 이웃들에게, 소외되고 고단한 사람들에게, 포근한 온정의 손길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크고 요란한 생색내기 식 이웃돕기 보다는 작지만 소박한 마음 씀씀이가 시린 몸과 마음을 더 따스하게 데울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의 ‘착한 사마리아 인’ 이야기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길에 쓰러졌던 할아버지를 도운 중학생들의 미담을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늘봄 고계수 도보여행가가 ‘퍼온 글’이라며 보내온 ‘하느님의 부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여적(餘滴)으로 남기는 것도 따뜻하고 포근한 인정이 그리워서다.

요약하면 이렇다.

‘몹시 추운 12월의 어느 날 뉴욕시 브로드웨이 신발가게 앞에 열 살 정도의 소년이 서있었다.

옷은 남루했고 맨발이었다. 두 손을 꼭 잡고 꼼짝없이 진열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덜덜덜 이빨을 부딪치며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부인이 소년에게 다가섰다.

“꼬마야 거기서 뭐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신발 한 켤레만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어요”.

부인은 소년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여섯 켤레의 양말을 주문했다.

그리고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야와 수건을 요구해서 가게 뒷자리로 소년을 데리고 갔다.

무릎을 꿇어 소년의 꽁꽁 언 발을 씻긴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고 점원이 가져다 준 양말 한 켤레를 소년의 발에 신겨줬다.

부인은 양말과 함께 신발도 사주었다.

소년의 차가운 발에 온기가 스며들었고 얼굴 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부인이 흐믓한 마음으로 돌아서 떠나려 하자 소년이 부인을 손을 잡고는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신기한 듯 물었다.

“아줌마가 하느님 부인이세요?”.

이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가 넘쳐 나 추운 겨울을 녹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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