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양영수/ 제주대학교 교수를 퇴임한 후 전업소설가로 활동 중

한국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이 관객 1천만을 돌파했다는 보도를 보고 놀랐다. 사이버공간을 즐기고 인공지능의 가능성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논하는 요즘 세상에서, 무지했던 시대의 지옥 이야기를 재미있게 보다니 의아스러웠다. 이런 영화가 흥행하는 것은 결국 우리들 마음의 깊은 속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과학의 발달과 상관없이 죄와 벌의 문제는 인간성 본연의 것이므로, 모든 민족의 신화에 죄 지은 사람들이 벌 받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제주신화에서 인간세상의 죄악이 벌 받는 이야기를 살펴보자.

제주신화에서는 사악한 역할에 대해서도 그 존재이유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창조의 이야기인 천지왕본풀이에서는 사기행각을 벌인 소별왕에게 이승세계 지배의 권력이 돌아간다. 사기를 치는 것도 인간세계 경영에 필요하다는 관용과 타협의 뜻인 듯하다. 이처럼, 사악한 행동을 보이는 제주신화의 주인공들에게는 그 사악함에 어울리는 직분이 맡겨지는데, 저지른 죄에 대한 응징이라기보다는 그냥 이단적인 행동에 대한 사실인증처럼 느껴진다.

출산신 이야기인 삼승할망본풀이에서 출산신인 생불왕으로 점지된 멩진국따님애기를 시샘하여 매질을 가한 동해용왕따님애기는, 모래밭 꽃씨 싹틔우기 시합에서 패했다는 이유로 경풍 걸려 죽은 아기들을 관장하는 저승할망신으로 낙착된다. 폭행죄 때문이 아니라 시합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스토리 구성이 흥미롭다. 송당궤내깃당 본풀이에서, 어린 아들을 애비 수염 건드렸다는 하찮은 이유로 무쇠석갑에 넣어 바다에 띄워버린 소천국과 백줏또는, 죽은 것으로 알았던 아들이 장성하여 돌아오자 도망치는데, 이들 부부가 죽어간 곳이 그대로 그들이 당신으로 좌정한 알송당과 웃송당이다. 친자유기(親子遺棄)에 대한 응징이 주거공간의 제한에 머무는 것은 부모자식 간의 절대적인 인륜관계를 존중함일 터이다.

운명신 이야기인 삼공본풀이에서도 혈육 간 인륜도덕은 의연하다. 강이영성이서불 부부는 불손해 보이는 셋째 딸 가믄장아기를 내쫓아버린 죄로 장님 거지가 되지만, 부자가 된 딸이 효성으로 베푼 거지들 잔치를 통해서 눈을 뜨게 된다. 인과응보의 운명을 이기는 것이 자식들 효성이라는 인정미담 모티브라 여겨진다.

제주의 신들이 죄 지은 인간에게 벌 주기보다 불행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너그러운 존재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저승차사 이야기인 멩감본풀이이다. 조상신 봉제사에 소홀한 탓으로 죽는 날이 앞당겨진 ᄉᆞ만이를 데리러 왔던 저승 3차사들은, ᄉᆞ만이 부부가 지극정성으로 차려놓은 향연과 시왕맞이굿 대접을 받고는 감동하여 그의 수명을 크게 늘려준다. 엄중한 천명을 따르는 대신에 가련한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ᄉᆞ만이는 조실부모한 고아로 자랐으니 조상신 대신에 길바닥에서 주워온 해골바가지를 더 위할 만도 하다.

부부간의 배신과 불륜행위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다는 스토리구성은 눈 여겨 볼 만한 제주신화의 특징이다. 시앗싸움 이야기인 문전본풀이에서 악독한 첩 노일저대귀일 딸은 남선비와 여산국부인의 선의를 악용, 일곱 아들을 죽이는 흉계를 꾸미다가 막내아들 녹디생이의 기지로 낭패를 당한다. 그렇지만, 그 결과로 본부인에게는 조왕신, 악첩에게는 측간신이라는 적정 신위의 안배가 이루어진다. 정숙한 본부인과 악랄한 첩이 죽어서는 한 집안을 지키는 동격의 수호신이 되는 셈인데, 쌍방이 사랑싸움에 연루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겨우 이해가 된다 할 것이다.

서귀포본향당본풀이에서 당찬 여인 고산국은 남편인 ᄇᆞ름웃도의 사랑을 자기 동생 지산국에게 뺏기는 얄궂은 수모를 당하지만, 이들 불륜의 남녀에게 살림분산 이상의 응징은 가하지 않는다. 송당리당신 이야기에서도, 남의 집 소를 잡아먹은 일로 하르방신과 할망신이 갈라선 다음에 한라산신의 딸과 사랑을 나누는 남편에게 내려지는 벌은 찾아볼 수 없다. 월정리나 토산리 등 여러 마을 당신들의 부부간에 행해지는 이단 행동은 ‘돗괴기부정’인데, 부정을 저지른 부인에 대한 응징은 쫓겨나서 살림분산을 당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독립된 마을당신으로 좌정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지 죄의 값으로 벌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마치 사기를 친 덕분에 이승세계를 차지한 소별왕 이야기와 같은 차원이 될 터이다.

제주신화에 죄를 짓고 사망의 엄벌에 처해지는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엄벌의 대상자는 사랑다툼 연루자들이 아니라 탐욕과 살인의 악역자들이다. 무조신 이야기인 초공본풀이에서, ᄌᆞ지멩왕애기씨와 그의 잿부기형제 세 아들을 질투하고 음해한 3천선비들은 ‘일흔다섯자 칼’로 ‘목이 뎅강 떨어지는’ 신세가 된다. 서천꽃밭 꽃감관 이야기인 이공본풀이에서, 할락궁이는 ‘수레멜망악심꽃’을 뿌려서 자기 어머니 원강아미 사망의 장본인인 제인장제의 일가를 멸족시킨다.

제주신화에서 가장 혹심한 죄악 응징은 인간차사 강님의 이야기에 나온다. 탐욕스러운 과양생 처는 자기 집 앞을 지나는 버무왕 3형제의 재산을 노리고 살인을 저지르지만, 무고한 세 청년의 생명은 거듭되는 환생의 운명 끝에 이 여인의 세 아들로 태어난 후 다시 비명에 죽는다. 아들 3형제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이 악녀에 대한 1차적 징벌이다. 인간차사 강님이 데려온 염라대왕이 과양생 처의 사지를 찢어 빻아서 바람에 날리니 각다귀와 모기가 되는 장면에 이르러 2차적 징벌이 이루어진다. 인간으로 살 때에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살았으니, 죽어가서 미물로 환생한 다음에도 다른 생물의 피를 빨아먹고 살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신들의 생명 사랑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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