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벚꽃이 흐드러졌다. 노란 유채꽃 물결은 멀미 일으킬 정도로 아뜩하다.

개나리, 진달래, 철쭉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락모락 맵시를 뽐내고 있다.

바람은 싱그럽다. 햇빛은 눈부시고 따사롭다. 완연한 봄빛이다. 아름답고 화사한 4월이다.

그런데 누가 이처럼 찬란한 계절에 ‘4월은 잔인하다’ 했는가?.

영국의 모더니즘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이 그랬다.

1922년에 발표했던 장편 시 ‘황무지’ 첫 소절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고 노래하면서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고 했다.

생명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워내는 4월을 왜 ‘가장 잔인할 달’이라고 했을까?.

해석은 각각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여 새 생명을 틔워내는 4월의 경이로움을 역설적으로 ‘잔인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역설의 논리다. 이른바 반어적 모순어법을 동원했다는 해석이다.

이와는 달리 1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 한 것이라는 분석틀도 있다.

‘정신적 아노미(혼돈) 현상’대한 비판이라는 시각이다.

시(詩) 감상은 독자의 몫이다. 외부가 간섭해 들어 올 수 없는 영역이 다.

천편일률(千篇一律)적 해석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어(詩語)역시 그러하다.

이를 긍정한다면 ‘4월은 잔인한 달’은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70년 전 제주의 비극‘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터이다.

바로 ‘4.3 참극(慘劇)’이다. 슬프고 끔찍하고 처참했던 사건의 비유로 인용될 수 있는 시구(詩句)다.

70년 전인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가?.

질문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 사건 또는 그 사태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인 해방공간에서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싸움에 제주도민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간단없이 이념의 제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최소 1만5000명에서 3만 명에 이르는 도민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제주전역이 초토화 됐었다.

4월에 피는 유채꽃이나 진달래, 철쭉이나 동백꽃은 바로 ‘도 전역에서 죽어 간 이들 희생자들의 피울음으로 피어나는 꽃’라는 비유도 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친척 간, 이웃 간, 증오와 불신이 독버섯처럼 새끼를 치며 갈등을 키웠다.

‘모르쿠다(모릅니다)’로 상징되는 강요된 침묵은 반세기를 넘게 이어졌다.

이로 인한 갈등과 분열은 착하고 순박했던 제주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짓이겨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속절없는 세월이 70년이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4.3’은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강고한 진영 논리가 소통의 벽을 차단하고 귀를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4.3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인식의 차이는 너무 거칠고 크고 멀기만 하다.

한쪽은 ‘4.3’은 ‘대한민국 탄생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남로당의 ’반란‘ 또는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쪽은 ‘무자비한 공권력과 불의한 국가적 폭력에 대한 항쟁이며 의거’라는 설명이다.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시각은 이처럼 양극단에 놓여있다.

아직도 ‘4.3’은 브레이크 없는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반 인권적인 사례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거부하려는 그 반란의 목적을 정당화 할 수 없듯이 반국가적 반란이라 하더라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반 인권적 폭력 또한 정당화 할 수 없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가공되지 않는 거친 진영논리와 풍화되지 않은 양쪽의 증오심은 ‘4.3 정리’의 최대 걸림돌일 수밖에 없다.

이념이나 진영논리를 떠나서 (어리석게) 접근하자면 ‘4.3’의 최대 피해자는 ‘진영’이 아니다.  '이념'도 아니다. 순박한 제주도민일 뿐이다.

무장대에 의해서건 토벌대(공권력)에 의해서건 도민들은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고 절망적 상황에서 참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그렇다면 진영싸움보다 이들의 원혼을 달래 해원(解寃)하고 한 맺힌 유족들의 숯덩이 같은 가슴속 멍과 응어리를 풀어주고 치유하는 일이 먼저다.

진영싸움은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갈등만 키울 뿐이다.

여기서는 화해와 상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항쟁’이니, ‘의거’니, ‘반란’이니, ‘폭동’이니 하는 상극적 논리 싸움이나 성격 규정은 역사의 평가에 맡길 일이다.

이에 대한 양쪽의 진지한 토론이나 사실여부에 대한 공동 조사와 연구도 검토해 볼 수 있는 해법의 하나일 수 있다.

옹졸한 고집에 사로잡힌 ‘진영 싸움’보다 서로 아우르고 품어 안는 ‘포용 심리’를 다스리고 키우는 일인 것이다.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아귀다툼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당장 끝장내려는 것은 오만이며 역사에 대한 반역이나 다름없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E․H 카(1892~1982)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데 있다”는 토인비의 명언도 오늘까지 유효한 교훈이다.

‘4.3’ 70주년 추념 일을 앞두고 모든 이들과 함께 새겨보고 싶은 경구(警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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