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수] 국제적 사건으로서 ‘제주4·3항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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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국제적 사건으로서 ‘제주4·3항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
  • 제주투데이
  • 승인 2018.04.0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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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

[제주투데이는 제주사랑의 의미를 담아내는 뜻으로 제주미래담론이라는 칼럼을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다양한 직군의 여러분들의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 제주발전의 작은 지표로 삼고자 합니다.]

허상수/ 고려대 대학원 졸업 사회학 박사,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 역임, 성공회대 교수 역임 현재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 제주4·3 제70주년기념사업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70년 전 제주섬은 학살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대비극의 현장이었다. 1950년 6·25전쟁과 더불어 고립무원의 섬에서 일어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다. 제주섬 안팎에서는 오랫동안 그 참극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단지 ‘4·3’, ‘사태’, ‘시국’ 등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숨죽여 불리어 왔다. 그리고 관련된 이들을 싸잡아 ‘폭동’과 ‘폭도’로 낙인을 찍고 억압해 왔다.

천만 다행스럽게 기적이 일어난 듯이 1999년 12월 여야합의에 의해 대한민국 국회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의결했다. 이 ‘진상규명및명예회복법’에서는 이 대비극을 ‘제주4·3사건’이라고 표현하였다. 너무나 아쉬운 명칭이었다. 이 법에서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1947년 3월 1일 3·1독립혁명선언 제28주년 기념식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시위대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관덕정 광장에서 처음으로 학살되었다. 미군정 산하 경찰이 쏜 총에 6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 이 가운데 21살 부녀자와 제주북교 6학년 국민학생도 있었다. 미군정 패트리지 대위도 현장 지휘에 나선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 경찰은 진상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당방위’라면서 피해자 탓을 했다. 2월말 입도한 육지 경찰들이 발포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1946년 10월 쌀값폭등에 항의하던 대구시민들을 향해 총질을 했던 전력의 소유자였음이 드러났다. 도민들의 분노와 원성이 커졌다. 이 관덕정 학살은 제주도민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전초가 되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영국군에 의해 5명이 죽은 사건이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바로 1770년 보스톤 학살은 영국군 병사들이 미국인들을 쏘아 5명을 죽였던 것이다. 이 보스톤 학살은 미국 독립전쟁으로 나아간 도화선이었다.

관덕정학살에 분노한 도민들은 3월 10일부터 학살 항의 총파업에 나섰다. 기업체 노동자뿐만 아니라 학교 교직자와 미군정 관리, 심지어 경찰관까지 이 총파업에 참여함으로써 전무후무한 민관연대파업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 중 미군정 최고위직이었던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은 제주를 ‘공산주의자들의 섬’이라고 매도하면서 일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뒤 12개월 동안 무려 2천5백여 명을 잡아 가두어 놓고 재판을 받게 했다. 끝내 고문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치사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일본으로 도망을 치던지 미군정에 굴복하던지 아니면 한라산으로 피신해야만 하는 막다른 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1948년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하며 ‘4·3봉기’에 참여했던 350명 규모의 ‘산사람’들을 잡겠다고 3만여 명 도민들이 희생되었다고 추산되고 있다. 2003년 10월 15일 대한한국 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공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8월 8일까지 859명이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주한미군(USAFIK)이 한국을 직접 통치한 평화의 시기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도 희생자는 1948년 9월에 153명, 10월에 804명, 11월에 2,205명, 1948년 12월에 2,974명으로 보고되었다. 그런 다음 1949년 1월의 2,240명, 2월의 671명, 3월의 361명, 4월의 221명, 5월의 156명, 1949년 6월의 117 명으로 보고되었다. 그때 역시 주한미군과 미군사고문단(KMAG)의 군대는 한국 군대와 경찰을 이끌고 모든 전투 작전을 지휘하고, 통제하고, 지원했다. 1947년 3월부터 1949년 6월까지 10,761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마을별 피해자 분포를 보면, 그들이 제주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 10월 현재, 사망 1만 244명, 행방불명 3,576명, 후유장애 164명, 수형자 248명 등 1만 4,232명이 희생자로 확인되었다. 국가 공권력을 잘못 행사하여 수많은 도민들을 희생시킨 불미스런 일이 있었음이 확인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과 국민에게 사과했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학살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이어진 제주학살은 국제적 사건이다. 미군정이 지배하던 평화 시기에 학살과 강제연행, 대량구속과 고문 등 여러 종류의 중대한 인권유린과 침해가 빈발하였고, 이승만 정권시기에 대량학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도피했고, 오사까 제주인 다수 거주 지역에서 1949년 2월, 피학살자 추도집회가 처음으로 열리기도 했다.

국제연합(UN) 조선임시위원단 감시아래 미군정에 의해 강행된 남한단독선거 실시를 반대, 거부, 기피하여 4·3봉기가 일어나자마자 경찰과 군대가 총칼로 제주도민을 학살했던 짓은 처음부터 미합중국의 국가범죄요 대한민국의 국가폭력이면서 국제적 사건이었다. 1948년 4월말 모슬포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과 인민유격대장 사이의 평화회담이 열려 더 이상의 충돌을 회피할 평화의 길이 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 경찰의 방해로 좌절되고, 미군정 수뇌부에 의해 강경진압 방침을 채택, 집행하면서 제주섬에서 인권실종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국제법, 특히 국제인권법은 더욱 발전하였다. 전후 국제인권법은 국가에 의한 중대하고 반복적이며 체계적이고 조직적 인권침해를 금지하고 이를 관습국제법의 규범으로 발전시켜왔다. 말하자면 노예제도와 집단살해(제노사이드), 인종차별, 고문 등의 금지를 관습국제법상의 규범으로 확립하였다. 이런 규범들은 어떤 국가가 제2차 대전을 전후하여 마련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약에 가입하였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국제공동체에 귀속하는 모든 국가들을 구속하여 이를 위반하는 경우 국제범죄로 처벌될 수 있다고 정의한다. 한 마디로 집단살해의 금지라는 규범은 이미 관습국제법을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민간인 학살의 금지 의무는 다른 체약국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의무, 대세적 의무(erga omnes)이며 국제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며 강행규범(jus cogens)이다.

예를 들면 제2차 대전 당시에 일어났던 히틀러의 망상에 의한 수백만 명의 유태인 대학살을 겪은 인류는 국제연합을 설립하며 이런 대비극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총회 결의를 통해 국제인권법에 앞서가는 관습국제법의 규범을 발전시켜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48년 12월 세계인권선언과 집단살해금지협약이었다. 그나마 미합중국은 이 집단살해금지협약 비준을 늦추고 유보선언을 함으로써 집단살해금지협약 위반의 틀 밖으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적대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거나 적대행위를 포기한 유격대와 자위대 참가자들을 자의적으로 처형하였다면, 아무리 당시 군대와 경찰이 국내법의 논리에 따라 4·3봉기를 진압할 권리를 지녔다고 한다고 보더라도 국제인도법상의 가해책임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1907년 헤이그육전규범의 마르텐스 조항(Martens Clause)은 전투상황에서도 민간인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을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제 협약에 대한 추가 및 국제적인 무력충돌의 희생자 보호에 관한 의정서(제I의정서)는 “이 의정서 또는 다른 국제협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민간인 및 확립된 관습, 인도주의 원칙, 공공양심의 명령으로부터 연원하는 국제법원칙의 보호와 권한 아래에 놓인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제주학살의 피해자들은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제인권법 위반 등을 사유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수많은 희생자 유가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형제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가해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피해자의 권리포기나 다름없는 일이다.

따라서 제주학살은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군대와 경찰이 저지른 국가범죄, 반인륜범죄는 국제관습인권법에 의해 징치되어야 하는 국제적 사건이다. 그리고 ‘4·3봉기’는 분단반대운동, 통일운동, ‘원코리아’ 운동, 인권운동, 평화운동, 생존권 운동, 민족자결권운동으로 제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제주학살과 4·3봉기는 ‘제주4·3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져야 할 충분한 근거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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