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길/ 행정학박사 ․ 前언론인

요즘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두렵기까지 하다. 고위공직자의 임용에 따른 청문회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 더욱 그러하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속담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결점이나 허물이 없는 자가 어디 있으랴마는, 해도 너무하다는 허탈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어서이다.

다중(多衆)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매체를 통해, 온갖 고상한 언어를 구사하며 독자들을 매혹시켰던 인재들. 혼자 깨끗하고 고고한 척 했던 인물이 정작 청문회에 들어서면,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천박한 사안들을 수도 없이 쏟아낸다. ‘아무렴 저 사람도 인간이니까’라며, 아무리 넓게 이해를 하려해도 유분수다. 더구나 솔선수범해야 할 위치에 있는 학자․법률가․공무원․정치인들의 행위가 그렇다보니, 실망을 지나 분노마저 치밀어 오르게 한다. 이른바 각계의 ‘지도층’이라는 작자들의 행태가 이럴 진댄, 어떻게 윤리․도덕을 논하고 사회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언행(言行)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이를 표현하는 글쓰기는 더더욱 막중하다. 책을 출판하거나 신문․잡지 등에 기고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해당분야에서 사회적 인정을 받는 전문가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글쓴이의 인품과 지식․경험을 믿고, 그 내용에 대체로 공감해 버리기 마련이다. 고스란히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분명해진다. 읽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언행일치가 아닌, 위선(僞善)이야말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거짓을 숨기고 겉으로만 선(善)한 체하는 사람. 그것도 ‘내로라’위세를 부리는 자들이 일상적으로 저질러왔다면, 이를 어찌 용인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런 세태를 탓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과연 ‘나’는 어떤가를 먼저 뒤돌아봐야 하는 게 순서일 터이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省察)이란 뭔가. 글자그대로 ‘반성하고 살피는 일’이다. 남이 바뀌어 지기를 바라기 이전에, 내가 우선 변화해야 하는 것이 차례이다. 타인을 개조하는 일이 그만큼 곤란하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국사를 공부할 때 들었던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는 경구를 오래 잊지 못하고 있다. 쇄국과 사대주의, 당파싸움과 무능․무기력에 빠져 망국을 자초했던 조선왕조. 이를 생각하면서 한국사에 흥미를 잃고 있던 소년에게는 커다란 깨우침을 주는 교훈이었다. 비단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관계에서도 이 금언은 통할 것으로 여겨진다. 상대방의 비열한 태도를 나무라기 전에 ‘나’는 저런 몸가짐을 보이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그러고는 즉시 실천하는 것이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反(거꾸로 반) 面(얼굴 면) 敎(가르칠 교) 師(스승 사). 스승 즉, 선생님을 뜻한다. 원래는 1960년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 국어사전에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패를 거울삼아, 이를 나에 대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그렇다. 나의 능력으로 타인의 행태를 바꾸기는 역부족이다. 대신에 저들의 위선적인 언행을, 나는 ‘하지 말아야 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설마 나이가 들더라도 ‘배울 것은 배우고, 익힐 것은 익혀가면서’ 성장해 가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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