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근/ 아라요양병원 원장

지난 12월 4일에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재판장 부장판사 정준영)에서 아주 특별한 판결이 내려졌다 한다. 음주 운전 중 뺑소니를 쳤다가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사람을 실형 대신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 판결이다.

내막은 이렇다. 3개월 동안 술을 끊고 저녁 10까지 귀가하는 조건으로 보석 허가를 내줬으며 이것을 충실히 이행하자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는 것이다. 생활습관을 바꿔 재범률을 줄이려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치유법원이라 한다. 몇 몇 선진국에서는 이미 이 제도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읽은 소설 장발장을 보면 굶주리는 조카들을 먹이려고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이야기가 나온다. 굶고 있을 조카들 생각에 여러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량이 늘어난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 보면 별것 아닌 죄로 십 년 넘게 감옥살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흔히 들린다. 생활이 어려워 조그마한 물건을 훔쳐서 감옥살이가 시작 되고, 전과자가 되니 출소 후 취직이 어려워 다시 범죄를 일으켜 전과 몇 범이라는 딱지가 붙는 일이 흔하다. 또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은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는 한 재범할 확률이 높다. 모든 죄 지은 사람들을 일률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면, 그렇지 않아도 만원인 교도소나 소년원이 미어터질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생활습관을 바꾸도록 하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처벌의 실효를 거두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선도조건부기소유예제도가 있다. 필자는 예전에 제주검찰청 소년선도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한 경험이 있는데,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 중에서 재범가능성이 적은 경우 소년선도위원들이 6개월 동안 범법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이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재범의 염려가 없으면 아예 기소를 하지 않아 처벌을 면제하는 제도다. 만일 도중에 선도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선도활동을 중지하고, 그러면 검사가 기소하여 소년원 생활을 하도록 한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잘못을 반성하고 열심히 선도활동에 참여하는 까닭에 기소되는 경우가 꽤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만약 이런 학생들이 소년원에 보내지면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지고, 앞으로 사회생활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여 사회의 부적응자로 남아 가정과 국가에 많은 부담이 될 것이다.

또 조정재판제도가 있다. 민사소송이 벌어지면 결국 옳고 그름이 결정되지만, 이 결정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니며, 또 사회적으로 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일단 재판정에서 마주치면 인간관계가 완전히 허물어진다. 또 법적으로는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이 되지만, 일반인들이나 판사가 보기에 패소한 사람이 억울할 때가 꽤 있다. 이럴 경우 재판으로 옳고 그름을 가릴 것이 아니라 조정위원들의 도움으로 당사자 간에 합의하면 재판에 가름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꽤 유용하다.

필자도 병원장으로서 조정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다. 우리 병원 소아과에서 진료 받은 환자가 아주 드문 선천성기형이 있어서 어렸을 때에는 아무 증상이 없었으나 자라나면서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일찍 발견하지 못 했다 하여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였다. 이 병의 진단에는 MRI 촬영이 필수인데, 당시만 하여도 이 장비가 제주도에는 없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대학병원 몇 군데에 있을 뿐이고 비용이 많이 들 때여서 돌도 안 된 유아를 가능성이 희박한 진단을 받으러 서울로 갈 것을 권하기가 소아과의사로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아이가 자라면서 증상이 나타나니 부모 입장에서는 진즉 서울로 가서 검사를 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판사 입장에서는 이것을 의사가 과실이 있다고 판결하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환자의 입장을 살펴보면 안타까운 점이 있어서 조정심판을 권유하였다. 처음에 필자는 화가 났다. 의사의 잘못이 없는데 화해를 권하니 이것이 판사의 올바른 자세인가 하는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환자 보호자분들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니 어차피 재판을 하면 대법원까지 갈 것이고, 그리 되면 승소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만 여러 해 동안 재판에 시달릴 것이고, 변호사 비용이 판사가 결정한 조정액보다 훨씬 더 많이 들 것이니 화해하는 게 좋겠다고 여겨져 강제조정에 응하였다. 10여 년 후 다른 장소에서 그 어린이와 아버지를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만약 재판으로 대법원에 가서 승소하였다면 이렇게 반가울까 생각하니 화해하기를 무척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경험이 후에 광주고등법원제주부 조정위원으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용서의 힘이라 여겨진다. 여러 해 전에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이 가장 큰 죄인이다.’라는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데,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 보기에는 큰 죄인이다.’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가 갔다. 함무라비 법전에 쓰여 있는 대로 거짓말하면 혀를 뽑고, 도둑질하면 손목을 자른다면 과연 지금 세상에서 온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을 오래 살다 보니 용서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용서를 해 주지 않으면 마음에 갈등이 남아 괴로운데, 용서를 해 주면 내 마음이 편해진다. 우리 사회도 잘못을 사과하고, 그러면 흔쾌히 용서하는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