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이야기] 홍성익 재일 제주인 화가
상태바
[김길호의 일본이야기] 홍성익 재일 제주인 화가
  • 제주투데이
  • 승인 2020.01.04 03: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작 활동을 그만두고 20년만에 다시 화필을 든다는 것은 세계에서도 좀처럼 드문 일입니다. 앞으로 홍성익 화가가 어떤 작품을 우리들에게 보여 줄런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2019년 11월 23일 저녁,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의 코리어타운, 조선이치바(市場)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도크야마반가(德山班家)에서, 홍성익(洪性翊. 만 63세) 화가의 인터뷰 내용이 한권의 책으로 나와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홍성익 화가의 저서

그의 자서전이나 다름없는데 <도야, 도야, 도야:どや、どや、どや>라는 제목과 '그림의 길, 식(食)의 길 분투기'라는 부제가 있었다. <도야,도야,도야>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필자 나름대로 번역한다면, <어때요, 괜찮죠, 안 그래요>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자리에 한국에서 축하차 일부러 오사카를 방문한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축하 인사였다. 20년만에 절필했던 홍성익 화가가 기업가의 길을 접고, 다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위해서 화필을 들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에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카를 방문하셨을 때, 동포 최대 밀집지인 오사카 이쿠노에서 기반을 두고 활동하시는 홍성익 씨가 발언을 하면 좋지 않을까 해서 부탁을 했었습니다."

오태규 오사카 한국총영사의 축하 인사였다. 오사카 이쿠노에서 태어나서 그림에 전념하다가 가업의 대를 이어 한국식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주식회사 도크야마물산(德山物産)의 사장이라는 기업가로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가 다시 화가로 돠돌아 온 홍성익 씨는 이쿠노토박이었다.

이 날 참석했던 필자는 홓성익 씨 인터뷰 기사를 써서 책으로 낸 저널리스트 카와세 슌지(川瀬 俊治) 씨와 제주투데이에 게재하기 위해 12월 17일 그의 아틀리에에 취재차 갔었다. 약 20개 항목을 선정하고 질문하는데 그 내용은 전부 책에 게재되었으니 책을 읽으면 다 알게 된다고 해서 바쁜 연말 속에서 한권 전부를 읽었다.  

모두 5장으로 나눠진 275쪽의 내용에는 제1장. 나의 원점, 제2장. 조선학교 시대, 제3장. 연작 '기원:祈願'의 탄생, 제4장. '떡국의 덕산' 한국에서의 전개, 제5장 꿈을 쫓다로 구성되었다. 책을 읽고 놀란 것은 너무 섬세할 정도로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기술되었고, 주석이 많아서 읽는 둑자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점이었다. 주석은 한,일 양국에서 일어난 일과 지명 등을 그때마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기록을 한 카와세  슌지 씨의 숨은 공로의 노력이었다.  

출판기념회에서 홍성익 화가와 가족들

제1장에서는 제주도민이면 누구나 얽메어 있는 4.3이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아버지 홍여표(2010년 80세에 작고.) 씨는 해방 후, 본적지인 조천읍 신촌리로 돌아가지만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조선이치바에서 뿌리를 내린 아버지는 조총련 조직 간부 활동을 하면서, 한국 전통의 떡을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기업으로 성장 시킨 과정은 재일동포의 축소판 일상들이었다.

제2장의 '조선학교 시대'는 두살 빨리 학교에 입학했던 소년 홍성익은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오사카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히로시마의 조선학교로 가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이 더욱 좋다는 아버지의 의향 속에 간 히로시마 유학이었는데 아버지의 교육열은 인상적이었다.

히로시마에서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쿄 조총련의 조선대학 2년제 사범교육학부 미술과에 입학했다. 2학년 봄, 학교 기숙사 규칙에도 어긋나는 오디오를 월부로 사서 기숙사에 두었다. 그러나 달달이 지불하지 못하고 체납한 것을 갚기 위해 기숙사를 떠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알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한 군데가 토쿄 긴자(銀座)에 있는 샹송클럽 '긴파리'(銀巴里)였다. 이곳에서 당시 일류 샹송 가수인 고시지 후부키와 미와 아키히로의 노래를 직접 들었다는 것과, 알르바이트 다니면서 들르게 된 다방 아가씨를 알게 되었는데 다방은 2층, 1층은 불고기집, 3층은 폭력단 사무실 이야기가 있었다.

다방 아가씨와 사귄다고 3층 폭력단 사무실에서 몇명의 폭력단에게 반죽음이 되도록 맞았고, 그들은 그를 죽인다고 조선말로 하길래 자신도 조선말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빌었더니 그들이 깜짝 놀라서 구타를 멈추었다. 너도 조선인이냐고 물으면서 왜 빨리 그 말을 안했냐면서 응급약 상자에서 약을 꺼내 치료는 물론 돈까지 주면서 빨리 병원에 가라는 부분은 평범하게 전개되던 내용 속에 깜작 놀랄 일화였다. 구사일생이었다고 말하는데 18세 때였다.

조선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총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히로시마학교 당시 후배였던 한청자 씨와 결혼하고 오사카에서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오사카시립미술연구소>에 다녔었다. 1981년에 예술관계의 교원들과 북한에 가서도 미술 공부를 했다. 그때에 1963년에 북송선(조총련에서는 귀국선이라고 한다)을 탔던 홍만표 숙부도 만났다.  

1984년 4월 홍성익 화가는 오사카에서 처음으로 '기원'(祈願 '이노리:祈り)이라는 부제를 달고 개인전을 열었는데 6일간에 1,500명이라는 관객이 관람하는 호평을 받았다. 

홍성익 화가의 작품 '비하인드'

 

그는 '재일조선중앙미술전유회부'에서 신인상을 비롯해서 여러 단채의 콘테스트에 출품했고 프랑스, 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1987년에는 일본에서 가상 역사가 있는 단체의 제83회 '태평양미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첫 수상자였다. 이외에도 1989년에는 일본의 문부대신상, 1990년에는 야스이상을 수상했다.

그후, 그는 1984년의 개인전의 인연으로 한국 경복대학장을 소개 받았다. 그로 인해 1989년 1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가 오픈할 당시 7층의 롯데뮤지움도 동시에 개관했는데, 그 기념으로 홍성익 화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 주제는 '기원'이었다.

조선적으로 처음으로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니 한국에서는 한국 회단만이 아니라 여러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주목의 당사자인 홍성익 화가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부모 고향인 제주까지 가서 성묘도 하면서 본대로 느낀대로의 한국 소감도 있었지만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이 개인전에서 당시 신예의 윤범모 미술평론가를 만났다. 그는 롯데측으로부터 개인전 도록해설의 의뢰를 받고 그 속에서 홍성익 화가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홍성익 작품 새계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그의 예술적 기저(基底)에는 민족애와 조국통일이라고 볼 수 있다. 미술이 갖고 있는 형태로서의 표현보다도 그 형태에 내포된 메시지에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 때문에 그가 취재하는 소재 거의가 동포가 구축한 전통적인 미술적 감성을 뿌리로 삼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에 나오는 그림이나 조선시대의 민화 등, 민족 고유의 색에 각별히 깊게 파헤치고 있다. 서구의 근대회화가 끊임없이 범람하는 일본에서 자신의 독자의 소리를 관철하는 것은 용의한 일이 아닐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민족의식을 토대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조합(組合) 시키면서, 고대의 시간과 오늘의 문제를 같은 화면에 공존 시킨다." 

한국에서의 개인전이 계기가 되어 홍성익 화가는 1990년 아버지, 홍여표 씨, 어머니 강재순 씨, 처 한청자 씨와 함께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꿨다. 조총련을 비난하면서 국적을 번경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을 비난하는 조총련 관계자는 없었다.

1992년 한국의 저명한 화가들과 여름에는 실크로드, 간다라, 인도를다녀왔고, 그해 겨울에는 중동, 지중해 여행 속에 스케치를 하면서 '살다'라는 주제에 대한 자기 수행을 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윤범모 씨에게 정말 젊은 자기도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몇 차례했었는데, 윤범모 씨는 자기 실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키워 주기 위해서 참가 시켰었다고 홍성익 씨는 술회하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홍성익 씨는 사업가로 변신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 대구에서 일본의 오코노미야키(한국의 빈대떡과 비슷한 커다란 파전의 일종) 가게를 대구와 서울에서 세 군데에 가게를 냈다가, 접어두고 떡국 생산을 한국에서 하기 시작했다.

압축 비닐 봉지의 '완전자동포장기'에 포장한 떡국은 공기에 접촉하면 바로 곰팡이가 생기는데, 곰팡이가 발생하지 않는 기술 개발을 일본에서 성공한 아버지 홍여표 씨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설비 기계 전부를 일본에서 반입 못한 관계로 출하한 첫 제품에 곰팡이가 발생했다.

출하한 제품이 반품되고 떡국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자금난으로 도산 위기에 처했었지만 설비 기계의 재정비로 떡국 제품에 곰팡이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사업은 순조롭게 운영되어 한국에 냉면, 김 가공 공장에 까지 진출하고 북한에도 냉면 가공 공장 설립을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북한에서의 냉면 가공 공장 설립은 추진 도중에 2007년 북한의 대륙간미사일발사로 유엔의 경제제재로 좌절되었다. 아직도 북한에 간 기계는 그대로 남아있다.

1998년부터 2017년까지 (주)덕산물산 사장직을 맡았다가 현재는 회장에 취임하여 2018년부터 20년의 침묵을 깨고 다시 화필을 들었다. 2017년에 면도를 할 때, 왼쪽 목 위에 위화감을 느끼고 진찰하니 '하부인두암'의 일종인 '편평상피하부인두암(偏平上皮下部咽頭癌)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방사선치료와 항암제 투여를 8주간에 걸쳐서 한후, 수술을 했다. 수술은 성공했다. 그래서 30년 이상의 지기인 카와세 슌지 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내 이야기를 듣고 한권의 책으로 기록해 달라고 부탁을 해서 나온 책이라고 홍성익 씨는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지난 12월 17일  취재차 아틀리에 가서 " 20년 전에 왜 절필을 하고 다시 화필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묻는 필자에게 홍성익 씨는 물론 글을 쓴 카와세 슌지 씨까지 그 대답은 책에 전부 나와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것을 길지만 게재한다.

"1989년 "기원'의 시리즈에서 1993년에 동아갤러리에서 발표한 작품의 차이에 대한 지적을 잘 받았습니다. 구상(具象)에서 추상적((抽象的)으로 왜 변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본 그대로의 표현방법에는 사진도 발달되었고 컴퓨터 그래픽도 있습니다. 사실보다도 데훠메드(deformed:변형)하거나 생략하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습니다.중략)"

"롯데뮤지움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민중진영의 화가가 정치활동에 권유했었습니다.저는 일절 무시하고 개인전을 마쳤지만 그는 나중에도 권유했었습니다만 역시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예술활동에 등진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학로에서 개최하는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자주영화나 민중화가가 관계한 자주영화 상영 등에도 잘 갔었고 기부도 했습니다.(중략)"

"제가 도크야마물산 사장인 1999년 일까요. 어느 회합에서 우연히 그와 우연히 만났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걸어 왔습니다. "내가 아무리 권유해도 무시해 왔다. 왜이지. 조선총련에서 나온 화가로서 우리들의 민주진영의 운동에 얼굴을 내밀면 어떻습니까." 그리고 다음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변절자가"

"그때의 충격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재일(在日)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 이런 정도인가>라는 생각과 순수하게 사물을 보아 온 자신에 대한 허탈감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화필을 계속 들어야 하는 의욕이 한 순간에 시들어버렸습니다. 그의 권유를 거절해 온 것은 연약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일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의 정치활동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가 같은 민중진영의 작가로서 해외에서 활약하고, 그들에게 말하라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적> 미술가는 높은 자리에도 있었지만 그 분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쪽발이가>였습니다.(중략)"

"민족진영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치집회에 참가하는 것은 다릅니다. <재일>로서의 생각은 한국의 작가들과는 다른 주제이겠지요. 제가 다다른 <기원>에 대해서도 <살다>에 대해서도 <재일>이니까 주제로서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재일한국 작가가 정치집회에 참가하여 민중미술진영에 관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참을 수없었겠지요."

"그후 얼마가 지나서, 민중미술 평론가였던 윤범모 선생님에게 전말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화가생활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단필선언을 했습니다. <재일> 미술가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선생님은 저의 말을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안됐지만 다시 화필을 들 때가 오겠지요"면서 오히려 격러해 주셔서 무척 고마웠습니다. 50세 정도에서 사장직을 은퇴하여 그림을 그릴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때의 심정은 정말이었습니다. 실크로드, 중동, 지중해를 여행하면서 그린 스케치를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시 화필을 들었다. 그가 지금 창작하는 작품은 내면 세계를 반영하는 작품이다. 지금의 작품도 남북문제, 사회정세에 문제 의식을 갖고 창작하는 것은 전과 다름없다. 엣날처럼 구상화는 아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작품에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그의 친구 박일남 재일화가는 <심상(心象)리얼리즘>이라고 한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필자도 동감했다.

화가와 기업인으로서 한국 생활을 하면서 그는 <기원>에서 <살다>로 인식이 바꿔지기 시작했다. 재일작가로서 <기원>을 주제로 한 연작을 창작해 왔지만 한국에 살면서는 <기원>에 대한 창작은 할 수없게 되었다.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재일>이었기 때문에 기원함으로써 분단된 조국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살면서는 그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분단된 또 하나의 국가인 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에 갈 수 있는 날은 바로 그것이 통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은 오버 표현이다>라고 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도로 한국은 먼 나라였습니다. 

허리 잘린 한반도의 한 곳, 북한 밖에 몰랐던 그에게 한국은 마치 자전(自轉)을 못하는 달의 뒷면과도 다름없었다. 지금은 그 뒷면의 한국을 북한보다도 더 잘 알게 되었다.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기원>의 주제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는지 모른다. 아니, 당연히 부딪혀야 할 곳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에 <재일미술관>의 설립은 그의 꿈이었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재일 화가들의 작품을 한국에서 한 군데에 모아상설 전시관을 만들어 많은 관람객에게 재일화가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었다. 서울 한복판에 토지까지 구입하여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 언젠가는 꼭 이루겠다고 한다.

"은퇴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최근에 조선이치바 츄오상점가 회장을 맡았습니까."라는 필자의 물음에 "그곳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중에는 시끄러운 사람이 회징직을 맡았다고 할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발상의 전환 속에 상점가를 발전 시켜야 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해야 합니다." 막힘없는 대답이었다.

정식 명칭은 '미유키모리상점가'인데 일본 메스컴들은 이쿠노 전부를 포함하여 '코리아타운'이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치바(시장)'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상점가는 '히가시(동)상점가' '츄오(중앙)상점가' '니시(서)상점가로 나눠져 있다. 홍성익 화가는 츄오상점가회장이다.  

"아, 그리고 제주 동문로터리 있지 않습니까. 그곳도 조선이치바처럼 활기 있는 지역으로 다시 되돌아 와야 합니다!"

갑자기 제주 동문로터리 재생에 대한 그의 발언에 깜짝 놀랐다. 그 지역이야말로 사실은 부모의 본적지이기 때문에 잘 안다고 했다.

언젠가 제주에서도 개인전을 열겠다는 그는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자녀는 2남 2녀이며 손자는 다섯이다. 지금은 사장직은 장남에게 물러주고 조선이치바 츄오상점가에 있는 아틀리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취재 마치고 나오는 필자가 신작 한편 찍고 가겠다니 직접 찍어 주었다. 작품 제목을 물었더니 비하인드(BEHIND)라고 했다. 곧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작품에 대해서 질문할려다가 그만두었다.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전환한 그의 화풍을 공명할 수있도록 해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