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서울 아니면 인천으로 우송되어 한반도를 두루 걸쳐 왔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면 3,4일이면 배달되는 EMS(국제특수우편물)이 2주일이나 걸렸다. 일반 항공편으로 제주에서 오는 신문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9월 달에 찍힌 소인의 신문이 11월 5일에 배달되어 두달이 걸렸다.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가 지난 달부터 일주일에 왕복 몇편이 부활되었다. 제주행 왕복편은 지금으로서는 꿈 같은 이야기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실체적 지상의 국경만을 차단한 것이 아니라 하늘까지 막아버리고 제주는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국제PEN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회장 강방영)가 발행한 '제주PEN 엔솔러지 제17집'이 유영(游泳) 속에 떠돌다가 겨우 오사카 우리집까지 지난 주에 배달되었다. 오래만에 제주 문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가끔 문인들의 작품집을 받고 읽은 감상을 제주투데이에 소개하고 있다. 그때마다 말하고 있지만 시에 대한 감상만을 소개하고 게재하고 있다. 소설, 수필, 동화 등은 글이 길기 때문에 전문을 개재할 수 없다. 소설 등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필자가 읽은 감상만을 썼을 때, 독자들은 좀처럼 그 작품들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드물어서 작품에 대한 인상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시는 전문 게재가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들과 그 시의 감상을 공유할 수 있다. 종이신문이나 다른 언론 매체들도 시집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꼭 시 한두편을 전문 게재하고 평과 감상을 적어서 소개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언제나 들고 있다. 지면 관계라면 시 본문을 작은 필체로 줄여도 괜찮을 것이다.

'제주PEN 엔솔러지 제17집'에는 시, 시조, 동시 53편과 수필 8편, 소설 1편, 동화 2편, 번역 1편, 희곡 2편과 2015년 제주문인들과 제주문학의 집 행사로 베트남 꽝아이성과의 문학교류 <베트남 문화예술 돌아보기>가 수록되었었다. 여기에서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시, 시조, 동시를 소개한다.

게재 순으로 강방영 시인의 <하늘을 날아가면서>이다.

하늘을 날아가면서

아침 흐린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 아래 지상에는 크고 작은 길들이/ 실 같이 도시와 마을을 이어 놓고/

마음에도 길들이 복잡하게 펼쳐지는데/ 고향과 유년의 삶이 점 하나에 축약된 듯이/목적지로 남아있는 부모님 푸른 무덤/

혈맥의 길을 더듬어 가는 마음/ 거기에 출렁이는 바다와 달리는 산맥/ 그 하늘에도 비행기 하나 날고 있다/

실체적 현실로 비행기 속에서 내려다 보는 지상은 살아 있는 조감도로서 아기자기하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성묘 가는 하늘 길에서 응축된 삶의 현실은 혈맥을 더듬어 가는 마음이 유년시절까지 거슬러올라 간다. 우리들 삶의 현장이 조감도 처럼 보이는 비행기 속에서는 자기자신을 객체화 시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음은 김순이 시인의 <바다 病>이다.

바다 病

- K를 위하여

그는 언제나/ 바다가 보이는/ 유리창가에 앉아 있습니다/

이야기 나눌 때에도/ 구름 따라 변하는 바다 쪽으로/ 한눈을 팔아/ 마주앉은 사람을 싱겁게 만들어버리는/ 그는 내 고향 사람/

수십 년 서울에서 맴돌면서/ 가장 그리웠던 건/ 바다였다고/ 나직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갚아야 될 빚이기에/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아/ 병이 된 듯 하였습니다/

이야기 나눌 때도 상대방을 보지 않고 마주 앉은 사람을 싱겁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 아주 오래 전의 바다의 추억을 되살리는 피사체에 불과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갚아야 할 빚이기에 하염없이 바라보는 응시가 자기지신은 당연한 행위였지만, 마주앉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피사체로 보이면서 병이라고 생각한다. 연쇄 반응 현상의 빚은 마음까지 파헤쳤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작년 10월 이후, 바다를 한번도 보지 않은 채 오사카시 주변만을 맴돌고 있다.

다음은 김용길 시인의 <섬 둘렛길>이다.

섬 둘렛길

벼랑 사이 섬 둘레/ 꼬리 달린/ 길을 만난다/

끊어질 듯 이어진/ 벼랑길/ 파도 물살에 씻기어/ 씻기워도/ 걷다 돌아오면/ 거기가 그 길/ 둘레둘레 맴도는 길/

시작이고 끝인/ 섬 둘렛길/

끊어질 듯 이어진 벼랑길은 없어 질듯 하면서도 그 험한 파도를 뒤집어쓰면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꼬리 달린 지름길도 다시 만들어 간다. 올레길로 소문 나기 전부터 이 벼랑길은 사랑을 받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섬 둘렛길은 우리의 일상처럼 둘레둘레 맴돌면서 되풀이되고 있다.

다음은 나기철 시인의 <손>이다.

치과의사 하다/ 몇 해 전 제주살이 온/ 70대 부부/ 가곡 교실에서 '첫사랑'/ 잘 부르고/

훤칠한 남편이/ 자그마한 아내 손 잡고/ 밤 숲길을 걸어간다/

어릴 때부터/ 멀리 가 지들커(땔감) 혼자 해 오고/ 아르바이트로 학교 나온/ 내 아내의 손은 너무 커/ 잡을 수가 없다/

학생시절 여윈 손으로 땔감을 혼자 해 오고 삶에 보탰던 손은 너무 커서 잡을 수가 없었다. 고달펐던 인생의 삶의 흔적이 나이테처럼 손에 잔주름이 생기고 투박한 손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지에서 제주살이 온 우아한 치과의 부부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서 귀여운 아내 손을 잡고 밤 숲길을 거닌다.

시인이여, 당신이 잡을 수 없었던 아내의 큰 손은 사랑의 큰 손으로 당신 가족들, 아니 우리 모두를 감싸고 앞으로도 믿음직스럽게 따뜻하게 감쌀 것이다.

다음은 문상금 시인의 <자리젓>이다.

자리 젓

곰삭은/ 자리젓/

입맛 없어/ 점심에 밥 비벼/ 먹었는데/

제법 맛있게/ 잘먹었는데/

물을/ 한 말을 들이켰다/

잘 익은/ 자리 한 마리/

삭고 삭아 젓갈 되었어도/ 바다가 그리웠나 보다/

한 말 물 속에서/ 되살아나 씽씽 헤엄치고 있다/

어느새 나는 짙푸른 바다가 되어/ 맛있게 먹은 죄(罪)로/ 자리 한 마리를 품고 있다/

건강에 나쁘다고 염분을 줄이라고 탈염분을 구호처럼 지금은 여기저기서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자리젓에는 소금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다. 전통적인 향토음식도 문화이다. 문화는 보수적이고 지킴으로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 한 말의 물이 아니라 두 말의 물을 먹드라도 자리젓의 시민권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다.

다음은 양금희 시인의 <잠 못 이룬 날들의 기억>이다.

잠 못 이룬 날들의 기억

설레는 맘으로/ 잠 못 이루던 밤을 헤아려보니/ 소풍 가는 날 몇 밤/ 수학여행 가던 날 몇 밤/ 결혼식 전 몇 밤이다/

잠을 설쳐도 좋은 날들은/ 곱디고운 무지개 같아서/ 헤아리다가 날 세어도/ 마냥 좋기만 하련만은/

하릴없이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다/ 그 몇 날로 만든/ 추억의 보석반지/ 손가락에 끼우니/ 오색 무지개 피어나네/

아련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면서 결혼식까지 머무르고 싶었던 나날들은 곱씹으면서 뒤돌아보는 순간은 한없이 즐겁고 가슴 찡하다. 그 반추의 시간이 아까워 만지작거리던 손가락 사이에 어느사이인가 반지가 되고 오색 무지개가 피어난다. 어른이 읽는 동시처럼 정겨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다음은 양민숙 시인의 <닮아 간다는 것>이다.

닮아 간다는 것

밥벌아를 시작한 딸이/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고/ 보내온 명품지갑/ 보기만 해도 닳을까 봐/ 서랍에 고이 넣어 두었다/

딸의 주머니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 남편 몰래 용돈을 보내준 날/ 남편 통장에서 송금이 되었다는 문자/ "당신도 보내수광?"/ "무사, 이녁도 보내서?/

부부라서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서 닮아가는 것이다/

부모라서 닮아가는 것인지 부부라서 닮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부모든 부부든 이렇게 닮아가는 것은 인생을 풍요스럽게 만든다. 분단 사회가 날로 확대해 가는 오늘의 사회 풍조 속에 언젠가는 가정의 분단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자가격리, 거리두기로 인위적으로 가정 분단까지 형성하고 있다. 이럴 때에 부부, 부모, 형제들 가정이 모두 닮아가기를 기원해 본다.

다음은 오영호 시인의 <지는 것이 이김이여>이다.

지는 것이 이김이여

풀리지 않은 일들이 늘 있게 마련이지만/ 별 것도 아닌 일에 아내와 다툴 때면/ 반백년 가까이 살아도 미로 같다 때로는/

그래, 내 탓이오 마음을 비우다가도/ 말꼬릴 잡고 흔드는 가시 박힌 말에/ 뇌리에 똬리를 틀고 쥐어짠다 가슴을/

줄기째 고구마 캐듯 들춰낸 지난 일들/ 극과 극 불꽃 튀듯 치받는 난타전에/ 코너에 몰리더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바탕 시소 끝에 창문 밖 하늘 보니/ 번뜩 스치는 글귀 '지는것이 이김이여'/ 다정히 손잡고 걷던 올레길이 보인다/

잘 알면서도 '지는 것이 이김'을 거부하고 부부의 난타전은 휴전 속에 다시 계속된다. 때로는 유효기간이 지난 과거사도 총동원되어 상대방을 무차별 할퀴러 든다. 아내만이 아니고 남편도 그렇다. 손익계산서 속에 이득이 전혀 없는 때로는 처절한 투쟁까지 비약한다. 아마도 이 부조리는 인생의 막이 내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다정한 부부의 따분함이 새로운 신선미를 찾기 위한 한여름의 천둥,벼락, 소나기 같이 엄습한 부부 싸움의 나날은, 더 나은 인생을 위한 조미료 치기인지 모르겠다.

다음은 장승련 시인의 <바닷가에서>이다.

바닷가에서

바닷가에 나갔더니/

꽃게가/ 시퍼런 바다를 꽉 물고 왔다/

바다는 나가려고/ 바둥거리느라/ 거품이 촤르르르/

꽃게는 놓치지 않으려/ 버티느라/ 거품이 방울방울/

모래톱 갈매기가/ 바다와 꽃게를/ 번갈아 지켜본다/

무심히 지나쳐버릴 바닷가의 한 순간, 바다와 꽃게를 갈라 놓고 바닷물 내뿜기를 그려냈다. 아주 조그마한 모습의 꽃게를 직시한 통찰력은 섬뜻하기까지 하다. 잔잔하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갈매기의 여유스러움에는 까닭 모를 미움까지 일어닌다.

다음은 끝으로 한기팔 시인의 <꽃나무 아래서>이다.

꽃나무 아래서

산다는 것은/ 때로는 혼자서 쓸쓸히/ 꽃나무 아래서/ 초롱한 아이들 눈을 생각하다가/ 늙은 아내와/ 꽃 지는소리 듣는 일/

아니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다가/ 소인(消印)도 없이 띄우는/ 엽서이듯/ 툭하고 꽃 지는 소리에/ 나 또한/ 창백한 꽃잎 하나 주워서/ 책갈피에 접는 일,/ 그런 일./

이 시는 <지는 것이 이김이여>와는 대조적이다. 부부 싸움의 난타전이 '지는 것이 이김이여'라면 <꽃나무 아래서>는 늙은 아내와 나란히 꽃나무 아래 다정히 앉아서 꽃 지는 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모든 것을 달관한 노부부가 아주 나약한 소리가 들릴런지 안 들리런지 모를 꽃 지는 소리를 듣기 위해 꽃나무 아래 앉아 있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인 없는 엽서처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꽃잎 하나 주워서 책갈피에 접는 일. 어쩌면 이 달관도 '지는 것이 이김이여'에서 온 깨우침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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