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제주신화산책 연재 작가 두 친구. 여연(왼쪽)과 홍죽희(오른쪽). (사진=김일영 작가)

50대 동갑내기 두 친구가 제주의 신당을 찾아 함께 걷는다. 제주의 신을 찾는 순례길에 오른 셈. 그 길에서 마을을 지켜준 신들과 만나기도 하고 30년 전 20대 청년의 ‘나‘를 만나기도 한다. 1만8천의 신과 함께 해온 제주인의 삶과 지금의 나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매주 금요일 ‘제주신화산책’ 코너에서 작가 여연의 ‘한라산의 신들’과 작가 홍죽희의 ‘제주의 돌에서 신성을 만나다’를 돌아가며 싣는다. <편집자주>

여름으로 접어든 6월 첫날, 보목리 답사를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제지기 오름에 올라 보목리 마을을 전망하고 나서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는 연디기 여드렛당과 신남밋 할망당을 답사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보목리 포구 쪽으로 바짝 내려앉은 제지기 오름은 오르는 길도, 정상에서의 전망도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길을 오르는 즐거움을 만끽할 새도 없이 정상에 다다라서 아쉬웠지만, 곧바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전망에 절로 감탄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섶섬이 떠 있는  바다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 보목리는 예쁘게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였다. 

제지기 오름에서 바라본 보목리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제지기 오름에서 바라본 보목리 풍경. (사진=김일영 작가)

오름에서 내려와 포구 앞에 서니 보목리 시인 한기팔님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시의 제목은 ‘자리물회를 먹으며’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시를 감상하고 나서 돌아서다가 바로 앞 식당에서 한기팔 시인을 본 것이다. 한기팔 시인은 시의 제목처럼 지인들과 자리물회를 드시고 계셨다.

사진작가 김일영씨가 다가가 인사를 드렸고, 나는 초면이었지만 한기팔 시인께 보목리가 왜 특히 ‘자리돔’으로 유명하냐고 여쭈어보았다. 그러자 시인께서는 스스럼없이 설명해 주셨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보목리는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서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꿔 먹으며 살았주. 특히 ‘자리돔’이 많이 잡혀신디, 덕분에 자리 구이, 자리 물회 같은 음식이 발달했어. 자리로 생선국을 끓여 먹는 곳은 제주도에서 보목리밖에 없주.”

보목리의 푸짐한 인심. 자리물회. (사진=김일영 작가)
보목리의 푸짐한 인심. 자리물회. (사진=김일영 작가)

오호, 그렇게 된 거구나! 조노기하로산또가 예촌본향에게 바둑에서 지고 먼저 좌정할 곳을 양보한 후에 아래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모티브는 중산간 지역의 농토를 차지하지 못하고 밀려난 세력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구나! 한기팔 시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신화 속 행간에 숨겨진 진실을 또 하나 깨달았다. 

우리는 먼저 연디기 여드렛당을 답사하고 나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해안가에 갔다. 이 당은 찾기가 쉽지 않은 바닷가 구석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하로산또의 후예처럼 천문지리에 밝은 김일영씨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이를 수 있었다.

제지기 오름에 오르는 숲길. (사진=김일영 작가)
제지기 오름에 오르는 숲길. (사진=김일영 작가)

 

하지만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수풀 속 오솔길과 낭떠러지처럼 깎아지른 절벽 위에 위치한 당의 모습은 이렇게 험한 길을 찾아와 정성을 들였던 조상들의 간절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은 어부들을 위한 선왕(도깨비신)과 잠수들을 위한 요왕당(용왕)이다. 바다에 들고 날 때마다 와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까만 현무암의 날카로운 바위 위에 소박하게 시멘트를 발라 만든 제단에는 거친 바닷길을 순하게 열어주십사 빌었던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절벽 위에 시멘트를 발라 제단을 만들었다. 멀리 제지기 오름이 보인다. (사진=김일영 작가)
절벽 위에 시멘트를 발라 제단을 만들었다. 멀리 제지기 오름이 보인다. (사진=김일영 작가)

문득 조노깃당 앞 안내판에 새겨놓은 신화가 생각났다.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를 하던 끝에 외눈박이 땅에 이르렀던 보목리 일곱 형제 이야기! 절벽 위의 신당 앞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니, 외눈박이 화적떼 역시 언제든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거친 바다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친 바다를 밭으로 삼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조노깃당 당신께, 혹은 해신당의 요왕신과 선왕신께 정성으로 빌었으리라. (끝)

여연. (사진=작가 여연 제공)

작가 여연. 

제주와 부산에서 30여 년 국어교사로 재직하였고, 퇴직 후에는 고향 제주로 돌아와 신화 연구로 인생 2막을 펼치고 있다. 생애 첫 작품으로 2016년 <제주의 파랑새>(각 펴냄, 2016)를 출판하였고, 이 책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2017년 출판산업진흥을 위해 실시한 ‘도깨비 책방’ 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연구소’의 신당 답사를 주도하면서, 답사 내용을 바탕으로 민속학자 문무병과 공저로 <신화와 함께하는 제주 당올레>(알렙 펴냄, 2017)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제주신화 연구모임을 1년간 진행하고 2018년 제주신화 전반을 아우른 책 <조근조근 제주신화>(지노 펴냄, 2018)를 3권으로 출간하였고 서울과 부산, 제주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제주신화 테마길을 여는 등 제주 신화 스토리텔링 연구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작가 김일영.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 집에 있던 카메라를 시작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를 여행했다. 2012년 제주로 이주해 ‘여행과치유’ 회원으로 활동을 시작, 회원들과 제주도 중산간마을을 답사하고 기록한 <제주시 중산간마을>(공저, 류가헌 펴냄, 2018)과 <제주의 성숲 당올레111>(공저, 황금알 펴냄, 2020)을 펴냈다. 또 제주 중산간마을 사진전과 농협아동후원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탐나는여행 대표이며 ‘여행과치유’ ‘제주신화연구소’ 회원으로 제주의 중산간마을과 신당을 찾고 기록하면서 제주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려는 입도 8년차 제주도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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