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瀛)' 개관 기념전으로 고영일 사진전이 열린다.

큰바다영에서 열리는 이번 첫 전시 제목은 '야이덜, 이제 어떵들 살암싱고예?'로 제주 사진가 고영일의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작업한 사진 중 제주 아이들 사진을 모아 소개한다.

사진 중에는 고영일의 1950년대 사진도 있다. 1978년 집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필름들을 거의 소실했지만 다행히 남아있던 1950년대 아이들 사진과 1980년대 전시를 준비하면서 고영일 님이 직접 인화하고 준비한 사진 등을 전시한다.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전시한 사진들은 아이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여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길가에서 바다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노는 모습도 담겼다.

이번 전시는 오는 20일부터 6월 20일까지 열린다. 전시장 오픈 시간은 오전 12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큰바다영은 제주 출신 사진가 고영일을 기리기 위해 가족들이 만든 만든 사진 전시 공간이다.

전시가 열리는 큰바다영의 주소는 제주시 만덕로 11번지 2, 3층이다. 전시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전화(070-4246-5504 혹은 010-8007-5504)로 문의하면 된다.

고광민 서민생활사 연구자는 다음 글을 통해 이번 전시의 의미를 조명했다.

 

‘사라져가는 제주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광민

나로 하여금 카메라를 놓지 못하게 하는 마음은 이른바 ‘개발’ 때문에 사라져 가버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다. 사실 사진인 치고 촬영지로서의 제주도를 한 번이나마 생각 안 해본 적이 없으리라. 거기서 자연 풍경으로서의 제주도는 언제까지나 이어줄 것이지만, ‘사라져가는 제주도’는 바로 지금부터가 가장 이른 출발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비로소 변방의 역사 현장으로서의 흔적이 그 고장 특유의 삶으로서 기록되어 지고는 마침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고영일(1926. 11. 25∼2009. 3. 25)의 『60년대의 제주도』(탐라목석원 출판) 사진집 서문의 내용이다. 고영일의 ‘사라져가는 제주도’는 바로 지금부터가 가장 이른 출발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불철주야, ‘사라져가는 제주도’ 실상(實相)을 사진으로 남기는 삶을 살았다. ‘사라져가는 제주도’의 ‘지금’은 1960년대였다. 이때 제주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1968년 9월 21일, 제주도에서 최초로 경운기 기술교육 수료식이 있었다. 이 수료식 행사는 소[牛] 대신 경운기로 밭을 가는 시대의 출발점이었다. 이제부터 제주도는 소가 필요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소의 월동 사료를 마련하였던 ‘촐왓’도 필요 없게 되었다. 1970년에는 생활환경 개선과 소득증대를 위하여 「새마을운동」이 일어났다.

‘생활환경 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새’(띠)를 덮었던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슬레이트를 덮어나갔다. 서서히 초가지붕을 이는 재료를 마련하였던 ‘새왓’도 필요 없게 되었다. ‘촐왓’과 ‘새왓’을 경운기나 트랙터로 갈아엎어 밀감나무를 심어나갔다. 자본가들은 이런 밭을 사들여 골프장을 만들었다. 1970년 3월 24일,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한라산에서는 마소 방목도 금지하였다.

‘사라져가는 제주도’ 이전 시대, 제주도 백성들은 산에서 밭에서 바다에서 마을에서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마련하였다. 원초적인 경제 사회 시대였다. 그 시대 제주도 아이들은 제주도 백성들의 생업공간인 산과 밭과 바다와 마을에서 놀고, 일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배웠다. 고영일은 그 시대 아이들의 실상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고영일 作(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성산일출봉 서쪽 ‘광치기’ 들판은 소들이 풀을 뜯던 곳이었다. 겨울에 성산리 소들은 성산일출봉 분화구로 들어가 월동하였다. 소들이 떠난 ‘광치기’ 들판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주었다. 
제주도는 논이 귀한 섬이라 육지 사람들처럼 논에서 생산한 볏짚으로 지붕을 이을 수 없었으니, ‘새왓’에서 생산한 ‘새’(띠)로 지붕을 이었다. 봄이 오면 ‘새왓’마다 ‘새’의 어린 꽃이삭이 피었다. 이를 ‘삥이’라고 하였다. ‘삥이’는 아이들의 간식거리임과 동시에 ‘삥이치기’의 놀이 도구가 되어주었다. 

제주도 갯가는 화산섬답게 돌이 많았다. ‘빌레’(너럭바위)와 돌멩이에는 바다풀이 무성하였고, 봄이 되면 바다풀을 먹고 자라는 ‘보말’(고둥), ‘구젱이’(소라) 등이 몰려들었다. 서귀항 갯가에는 아이들도 저마다 ‘구덕’(바구니)을 들고 갯가로 몰려들었다. 

제주도 화산섬의 빗물은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갯가에 이르러 솟구쳤다. 용출수를 중심으로 하여 마을이 들어섰다. 용출수는 먹는 물과 함께 빨래하는 물이 되어주었다. 김녕리(구좌읍) 용출수 빨래터에는 어른도 아이도 모여들었다. 그리고 밤에 제주도 해안경비의 구실로 세운 초소에는 긴장이 감돌았겠지만, 경비원들이 떠난 초소는 아이들의 병정놀이 터전이 되어주었다. 원초 경제 사회 시대 제주도 아이들을, 「사진예술공간 큰바다 영(瀛)」에서 『야이덜 이제 어떵들 살암싱고? -고영일이 만난 1950∼80년대 제주 아이들』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고영일은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목포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때 한 장씩 말린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고, 밤에는 하숙방 사진 현상실에서 사진을 만들었다. 그 당시 제주도 자제(子弟)가 타향에서 유학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아버지는 고영일에게 카메라와 필름을 사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영일은 ‘사라져가는 제주도’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고영일의 장녀 고경심은 제주시 건입동 복신미륵(제주민속자료1호) 동산 큰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사진예술공간 큰바다 영(瀛)」을 세웠다. 3대의 공덕(公德)으로 탄생한 이곳은, ‘사라져가는 제주도’ 역사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을 공간의 동산이 되었다. 「사진예술공간 큰바다 영(瀛)」은 ‘사라져가는 제주도’ 모습이 담긴 사진을 발굴하고, 전시하고, 연구하게 될 것이다. 제주도 고영일 집안 3대에 걸친 공덕 앞에 고개 숙이고, 또 박수를 보낸다. ‘사라져가는 제주도’는, 이제 사라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가 고영일(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사진가 고영일(사진=사진예술공간 큰바다영 제공)

 

제주 사진가 고영일 약력

리석 고영일 利石 高瀛一 Koh Young-il (1926~2009)

제주 출생

목포상업, 혜화전문 문학과, 서울신문학원 전수과

신성여고 교사, 제주신보 편집국장, 해병대 종군보도반원,

제주문화방송 총무부장, 제주와이즈맨 초대회장, 대동산업 대표

 

제주카메라클럽 창립회원 및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자문위원

한국창작사진가협회 감사, 제주도미전 초대작가, 경기도미전 초대작가

제주도 문화상 수상(1990)

 

(저서) 카메라교실 기초편, 응용편, 인상사진의 이론과 실제

사진촬영의 이론과 실제, 포토클리닉(사진에 관한 Q&A),

사진평론집 대한민국의 사진을 말하다, 제주언론의 선비논객 고영일(이문교 엮음)

(사진집) 60년대의 제주도, 고영일이 본 제주의 속살

(전시) 1955, 56, 63년 개인전, 1989년 초대전(탐라목석원), 1996년 초대전(제주카메라클럽), 1997년 서울 코닥살롱 개인전, 2011 고영일 2주기 추모사진전(돌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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