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4월3일 오전 촬영한 제주4·3평화공원 분향소. (사진=제주투데이DB)
지난 2019년 4월3일 오전 촬영한 제주4·3평화공원 분향소. (사진=제주투데이DB)

4·3의 ‘전국화·국제화’가 다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전국화·국제화’라는 구호에는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이 그동안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역이라는 한계를 온전히 넘지 못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2000년 제주 4·3특별법 제정 이후 진상규명운동과 명예회복의 법제화의 성과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최근 발족한 ‘4·3 진실과 정의를 위한 국제네트워크’는 제주를 비롯한 일본, 미국, 유럽, 대만의 4·3단체들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4·3의 국제화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제주 4·3 진상규명 운동과 그간의 국내외에서의 과거사 연구의 성과를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미래를 위한 발전적 모색은 현실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제포럼에서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4·3담론 국제화를 위한 과제’에서 주장한 ‘4·3의 진실규명이 아시아 전후 체제에 대한 반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그 당위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관련기사 4·3, 이념 논쟁 아닌 국제적 담론이 되기 위해선?) 특히 ‘4.3 학살의 원인이 반공주의가 아니라’는 대목은 전혀 동의하기 힘들다. 토론과정에서 전달이 잘못되었다고 해명하기는 했지만 해명을 들을수록 국내외 전후사 연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난달 27일 오후 제주시소통협력센터 5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4·3 진실과 정의를 위한 국제포럼’에서 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가 ‘4·3담론, 국제화를 위한 과제’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달 27일 오후 제주시소통협력센터 5층 다목적홀에서 열린 ‘4·3 진실과 정의를 위한 국제포럼’에서 이택광 경희대학교 교수가 ‘4·3담론, 국제화를 위한 과제’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반공주의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논리와 정서’(권혁범, <반공주의 회로판 읽기-한국 반공주의의 의미체계와 정치사회적 기능>)라고 규정할 때 반공주의는 전후 한국의 정치 체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반공주의가 세계 냉전체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학계의 보편적 인식이기도 하다. 

‘냉전’(Cold War)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1945년 조지 오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핵심은 미국과 소련의 배타적 이데올로기와 이를 군사적으로 지탱하는 핵무기의 등장이었다. 냉전사 연구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역사학자 베른트 슈뢰버 역시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냉전이란 무엇인가-극단의 시대 1945~199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조지 오웰이 쓴 칼럼에서도 미국의 핵무기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며 이를 평화 없는 평화의 지속, 즉 냉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쓰고 있다. 

조지 오웰에 의해 냉전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이를 정치적 과제로 제시한 사람은 1946년 미국 대통령 고문 바루크(Bernard Baruch)의 참모였던 스워프(Herbert B. Swope)였다. 전후 체제가 미소 대립의 산물이라는 점은 일본 전후사 연구자인 도쿄외국어대 나카노 도시오(中野敏男) 교수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전한 1945년 8월 9일이 한반도 분할 점령의 시작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단적으로 미소의 긴장과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없었다면 한반도 분할점령도, 이로 인한 제주 4·3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이 유해진 지사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확인 결과 안재홍 민정장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1948년 5월5일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왼쪽 두 번째부터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안재홍 민정장관, 맨스필드 제주군정장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딘 소장과 악수하고 있는 인물이 유해진 지사로 기록돼 있으나, 이후 확인 결과 안재홍 민정장관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자료)

국내외 전후 체제 연구사를 이야기한 이유는 제주 4·3의 국제화를 위한 논의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3일의 항쟁과 그해 11월 이후부터 벌어졌던 대학살이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쓰기 위해서는 냉전이라는 미소의 대립과 반공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1947년 3월 미 트루먼 대통령이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트루먼 독트린을 천명한 이래 반공주의는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비정치적 영역에서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최근 ‘문화냉전주의’에 대한 역사학계의 관심도 냉전의 대립과 반공주의의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대한 실증적 연구 성과이다. 

유럽에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CIA를 동원해 문화를 통한 선전선동활동이라는 첩보활동을 펼쳤다는 사실 역시 비밀해제 문서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세계문화자유회의라는 이름으로 무려 17년 동안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20종이 넘는 잡지를 발행한 비밀 첩보 작전은 미술전시회, 음악 콘서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다. 

1948년 7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는 브라운 대령의 발언이 담긴 미 국무부 문서. (사진=제주4·​​​​​​​3평화재단 제공)
1948년 7월 작성된 미 국무부 문서에는 브라운 대령이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와 관계되어 있다”고 발언한 내용이 담겼다. (사진=제주4·3평화재단 제공)

제주 4·3항쟁의 원인과 이후 벌어진 대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당위를 국제사회에 설득하기 위해서는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공백 상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후 체제 이후 미국이 반공주의라는 명목으로 자행한 수많은 비밀 프로젝트와 이로 인해 빚어진 폭력과 억압의 문제를 동시에 논의할 때야 제주 4·3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온전히 물을 수 있다. 

세계 체제로서의 냉전국가 미국은 전후 수많은 국가에서 반공이라는 몽둥이를 든 자경꾼의 역할을 자임했다. 그것은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비정치적 영역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첩보였고, 교묘하게 은폐된 폭력이었다. 냉전체제를 지속하기 위해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한 미국의 폭력성은 세계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아시아에서 제주를 비롯해, 오키나와, 베트남은 물론, 유럽과 남미 역시 마찬가지다. 

제주 4·3의 국제화는 냉전체제가 만들어낸 반공주의 폭력의 민낯을 응시하고 그것이 남긴 폭력의 역사와 연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법제도화에 의존해온 제주 4·3 담론의 발전적 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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