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해방전선]은 삐리용과 노지의 일상 기록입니다. 오늘 화해하고 내일 다시 싸우는 부부싸움 대공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과장과 미화 없이 씁니다. '부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부부의 해방'을 맞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필자 주)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부부해방전선]은 삐리용과 노지의 일상 기록입니다. 오늘 화해하고 내일 다시 싸우는 부부싸움 대공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과장과 미화 없이 씁니다. '부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부부의 해방'을 맞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필자 주) 제주시 이도2동에서 '금요일의 아침_조금, 한뼘책방'을 운영하는 노지와 삐리용.

내 일요일의 일과는 단순하다. 오전에 축구를 하고 돌아와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는 푹 잔다. 평화롭고 안온하다. 이 일요일의 평온한 루틴에 균열을 내는 자가 있다. 물론 나의 아내다. “좀 이따 마트 가자! 두 시간 낮잠 자고 세 시에 가자.”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넘기고, 일단 잔다.

“세 시야! 마트 가자!” 한참 깊은 수면의 동굴에 있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성마른 아내의 목소리! 단잠에서 깨어나 차를 몰고 움직일 생각을 하니 지옥이 따로 없다.  

“내일 가자. 진짜 못 일어나겠어.”

경험해본 바, 두려움 없이 진실을 고하려면 먼저 잠에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등을 돌린다. 물론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보채지만, 잠의 위력은 강하다. 결국 아내가 진다. 마지막 마침표만 남았다.

“띠발!”

아내가 욕 한 마디를 남기고 휙 돌아선다.

언젠가 이렇게 물은 적 있다. “그게 남편한테 할 소리야?”

아내가 말했다. “그렇다고 남의 남편한테 할 소리는 아니잖아?”

아내는 남들에게 싫은 소리는커녕 아쉬운 소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다만 남편인 나에게, 기회만 있다면, 절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뿐이다. 그 욕을 듣고 나는 어쩌느냐고? 잔다. 나는 나의 입을 먹는 데 주로 쓰지 욕하는 데는 거의 쓰지 않는다! 아, ‘노’라고 말할 때도 곧잘 쓰는 것 같다. 우리 사이에서 욕의 발화자는 100% 아내 노지이고, 수신자는 나 삐리용이다.

며칠 전이었다. 가게 공사 중에 이틀 정도 시간이 비자,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나무 세 그루를 옮겨심기로 마음먹었다. 오래 뿌리 내린 나무를 뽑아 새로운 자리로 옮겨 심는 일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옮긴 나무가 잘 생착할지 그건 나중 문제다. 내가 옮기기로 마음먹은 나무는 모두 십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던 것들이었다.

포클레인 없이, 오직 삽 한 자루와 나의 육체와 의지로만 감당해야 할 고난의 행군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때 좀 목숨을 거는 편이다. 나무도 괴롭고, 나도 괴롭고, 심지어 보는 이도 괴로운 고된 일. 무한히 반복되는 삽질. 누군가는 알리라! 아, 고통의 카타르시스여!

아내는 가게 내부에서 하루 종일 물건을 정리했다. 동네 후배 J가 와서 잔손을 보탰다. 극심한 노동 끝에 어둠이 내렸다. 나무 옮겨심기도 끝이 났다. 맛있는 저녁을 먹어야 했다. J와 함께 식당에 앉아서 오늘 하루의 노동에 대해서 실컷 무용담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J가 불쑥 말했다.

“오늘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뭔데?”

“언니가 오늘 형부를 부를 때 제일 많이 쓴 호칭이 뭔지 알아요?” 눈을 반짝이며 J가 물었다. “자기야,랬어요.”

그랬나? 우리 부부는 둘 다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가 형부를 부르는 호칭이 다양하잖아요?”

아내가 물었다. “어떻게 부르는데?”

“보통은 선배! 더러는 삐리용! 그리고 야!”

아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과하도록 크게 웃었다. 민망한 게 틀림없다. “아니야. 나 ‘자기야’도 많이 쓰는데?” 하지만 아내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쓰긴 쓰는데, 적어도 오늘 정도의 고강도 노동을 했을 때에나 그렇게 불러주는 것 같던데요?”

맞다. 오늘 하루 종일, 나를 부르던 아내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없었다. 다정했다. 부드러웠다.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글귀. 불문학자 김화영 선생의 알베르 카뮈 박사학위 논문에서였나. ‘이 세상은 아주 잘 익은 오렌지 같다. 한입 깨어 물면 과육이 터지고, 과즙이 입가를 흠뻑 적시는 아주 잘 익은 오렌지! 그 오렌지/세상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침이 고인다.’라는 요지의 아름다운 문장을 읽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 기억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하나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또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를 따라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카뮈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문장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나는 입 다문 채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오늘도 내게 욕을 할 것이다. 그녀 눈앞에 오랫동안 뿌리 내린 삐리용이라는 세상을 향해! 아내여, 당신의 욕이 ‘오렌지’가 될 때까지 어쨌든 우리의 땅을 일궈보겠다! 그렇게 삽질하는 프로메테우스가 되겠다. 어때, 자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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