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 조색 재료들(사진=김재훈 기자)
천연 조색 재료들(사진=김재훈 기자)

현대의 회화 작품들에도 석유화학을 통해 만들어진 재료들이 들어간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물감 중 하나인 아크릴 물감에는 미세 플라스틱들이 들어가 있다. 뿐만 아니다. 안전성 검사를 하지 않은 일반 물감에는 크롬, 수은, 납 등 중금속 물질들이 함유돼 있다. 색깔이 더 쨍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건축 마감재도 마찬가지. 이대로 괜찮은 걸까.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은 없을까. 85년생 최유라 씨는 그 답을 찾아나가고 있다. 그의 제주 살이는 10년 되어간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안산에서 세계를 만나다

최유라 씨는 예술고등학교에서 시각예술(조소)을 전공했다. 이후 건축과 디자인이 결합된 학부가 있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건축사무소에서 인턴 생활도 해봤지만 건축보단 예술판이 적성에 맞았다. 20대에 파주 해이리에서 전시 기획 일을 했다. 그곳은 고급스런 전시 공간들로 채워진 ‘화이트큐브’였다.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한 박제된 예술 작품들의 공간 같았다.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관계를 맺은 한 작가가 그에게 말했다. “안산에 재밌는 게 있는데 한 번 와 볼래?”

리트머스라는 다문화 이슈로 유명한 문화예술단체가 안산에서 활동 중이었다. 광장에 모인 온갖 나라 사람들이 한국 작가들과 서로 마주 보면서 스케치했다. “작은 동네에 온갖 나라의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작가로 참여하며 문화교육 활동을 펼쳤어요. 이주 노동자와 관련한 전시도 하고, 다문화 축제도 기획했어요.”

예술활동에 대한 지원이 지금만큼도 이뤄지지 않던 때다. 한 달에 30만원의 활동비를 받았다. 생계가 여의치 않았다. 단체 활동에도 염증이 느껴졌다. 공공미술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말이 되지 않는 요청을 따를 때면 결과물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예술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다 김월식 작가를 만났다. 그를 따라 다니며 문화예술교육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 분에게 많이 배웠어요. 예술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어떤 지형, 문화, 개성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작가만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이한 색깔’이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문화예술교육 활동에 참여하면서 예술에 대한 자신의 세계를 그려나가게 됐다.

최유라(사진=공성배)

제주로 이끈 한 문장 ... "저승으로 물질하러 간다"

최유라 씨는 예술교육 활동을 하면서 ‘감각수업’ 같은 것들은 진행했다. 우리 몸의 감각을 인식하는 작업이다. 소리와 텍스트를 결합시켜 공감각을 강화한다거나, 특정 감각을 배제해서 낯선 경험을 해보도록 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시를 들려줬다.

“아이들이 연필로 선을 하나 긋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긋는 선, 최대한 느리게 긋는 선. 흉내 내는 선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선. 세상을 관찰해서 얻어내는 선이 무엇인지 그 기초부터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가르쳤어요.” 선을 공간으로 확장한다. 작은 조형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아지트나 동굴 같은 것들.

“그런 걸 주면 애들이 미쳐서 놀아요.(웃음) 그런 교육을 했어요. 그러다보니 내 작업을 하고 싶어졌는데 처우나 대우를 생각하면 미래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 무렵, 제주 해녀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저승으로 물질하러 간다’는 문장이 최 씨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해녀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면서 그림을 계속 그려나갔다. 그림들을 아우르는 이야기도 떠올렸다. 직접 봐야겠다, 제주도로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제주 생활의 시작 ... 어서와, 이런 제주는 처음이지?

서울 금천구 도하부대 부지에서 뮤지션 하림과 아티스트들이 공동 예술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기획 일을 하면서 막 출범한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사업 내용들을 살펴봤다. ‘수요자맞춤교육 사업’이 신설됐다.

최 씨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청년예술가들과 제주에 정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빈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읍면리 단위 지역의 유휴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그 두 지원사업을 연계해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답사 차 6개월 정도 제주도에 내려와 방 한 칸을 얻어 살았어요. 고성환 삼춘, 문무병 박사님, 간드락소극장의 오순희 관장님 등을 만났어요. 제주도가 어떤 신묘한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신화, 역사, 생태, 일상문화 관련해 다 알고 싶었고요.”

물어물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웹툰, 동양화, 사진, 일러스트 작가 등과 동행하면서 제주 곳곳을 일주일 동안 돌아다녔다. 지역 얘기를 듣고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경험을 토대로 참여 작가들이 서울에서 ‘왕봥강 고라줍서’ 전시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이장님한테 노는 창고가 없는지 물어 봤는데, 마침 창고가 있어서 공간을 마련하게 됐죠. 그 공간이 빈집프로젝트 5호로 선정되면서, 탐라표류기가 문을 열었어요.”

빈집프로젝트 지원을 받으면서 아티스트 레지던시 등 다양할 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빈집프로젝트는 선정된 단체가 별 문제가 없으면 별 문제가 없으면 향후 5년 간 지속 지원해주는 사업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의 돛을 밀어주는 바람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선정되자마자 다음 해에 도지사가 바뀌더니 다 틀어지더라고요. 빈집프로젝트 사업이 문을 닫는 지경이 됐죠. 지원도 다 취소되고. 그러면서 탐라표류기도 표류하기 시작했어요.(웃음)”

천연 물감에 대해 설명 중인 최유라 씨(사진=김재훈 기자)
천연 물감에 대해 설명 중인 최유라 씨(사진=김재훈 기자)

천연미장과 천연페인트에 표착하다

이후 몇 년간 아무런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한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주민들과 기타동아리 만들었다. 연극 공연, 시 발표회, 김광석 콘서트 등을 열었다. ‘신석기 테크놀로지’로 이름 붙인 적정기술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어떻게든 ‘탐라표류기’라 씨에는 공간을 꾸려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지인으로부터 천연미장을 하는 송호삼 씨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신석기 테크놀로지에 초빙해서 천연미장 강의를 열어보는 건 어때? 무료래.”

초대해서 강의를 들어보니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이후 합숙하듯 하면서 한 달 반 동안 기술을 익혔다. 석회 기본미장과 유럽 각국의 전통미장 기술을 배웠다. 소조 작업 경험이 있다 보니 재료의 물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 빠르게 익혔다. 그러면서 미장 공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미장기술자로 먹고 살 수 있을까 송 선생님을 따라다녔어요. 그런 시기가 2년 반 가량 될 것 같아요.”

천연 조색 재료(사진=김재훈 기자)
천연 조색 재료(사진=김재훈 기자)

천연미장 일을 하고 관련 제품을 살펴보면서 환경 운동의 역사와 어떤 원료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배웠다. 그러면서 이게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창업 지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창업 과정도 수월치는 않았다. “천연미장은 사람들이 바로 적용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친환경 페인트로 시작해보자.” 2018년 말 회사를 열었다. 천연페인트를 판매하고 시공하는 페인트닥터다. 운영이 쉽지는 않았다. 천연미장과 천연페인트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이끌어 낼까. 회사를 연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민이다.

최유라에게 천연미장이란?

요약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내 삶과 다 연결돼요. 물질을 다룬다는 것. 물질을 다루면서 내면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내면만이 아니라 생태계, 지구와 연결되는 느낌. 천연미장 재료들은 지구에서 살았던 생명들이 만든, 퇴적층 자체거든요. 천연미장의 기본 재료인 석회는 플랑크톤이 해저로 가라앉아 만들어졌어요. 석회 순환고리라는 게 있어요. 인간은 석회를 불에 굽고, 물에 담그고 안정화한 다음 반죽을 사용해요. 그러면 반죽이 다시 굳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면서 원래의 성질로 돌아가요.

미장 작업 중인 최유라(사진=공성배)
미장 작업 중인 최유라(사진=공성배)

건축은 물론 예술 영역에도 플라스틱이 들어가요. 평생 살면서 예술가로 산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거든요. 작업을 하면서 아크릴 물감과 아크릴 페인트를 사용했었어요. 이것 역시 환경오염에 기여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고래 사체나 새의 사체의 배를 갈라보면 플라스틱을 삼켜서 질식사 하거나 소화기 문제로 죽는 경우가 많은데, 플랑크톤의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걸 알리는 일을 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최유라 씨는 천연미장에 대해서 근본적인 원리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면벽수행’으로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이다. 천연미장 기본기를 가르치는 수업을 매달 정기적으로 진행해 왔다. 생태 예술 재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인터뷰 중에 한 회화 작가가 방문해 천연 재료에 대해 문의하기도 했다.)

“미술 교육계에도 플라스틱이 들어간 물감이나 페인트를 쓰지 말자, 플랑크톤을 지키자는 생각에 동참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최 씨는 그런 공간을 찾아다니며 교육하고 그런 일을 해나갈 예정이다. 자신이 익힌 기술과 지식으로 제주도를 생태친화적으로 만들어나가는 방안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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