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태권도 발상지에 대한 역사를 재조명해서 제주 지역 태권도를 진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태권도를 통해 남북 평화 가교 역할도 해야 한다고. 하성용  제주도의원(서귀포시 안덕면)은 12일 제주도의회 도정질의에서 제주도 태권도 진흥 및 발상지 지원 조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태권도 발상지’를 지원한다? 제주도에 '태권도 발상지'가 있다고? 무슨 얘기일까. 역사학자 이영권의 책 <제주역사 다시보기-왜곡과 미화를 넘어>의 마지막 챕터는 제주도가 태권도의 발상지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고자 한다.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

태권도의 역사를 말하면서 최홍희(1918)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태권도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어린 시절 가라테를 배웠고, 해방 후 국내 주요 무도장에서 가라테 등을 변형하며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수련하던 무예를 통일해 태권도를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1953년 남제주군 모슬포에 창설된 29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태권도를 군인들에게 보급했다. 경례 구호가 '태권'이었다고 전해진다. 

태권도 ‘원조’에 대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홍희가 자신이 보급하는 무술에 태권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사설 도장이 아닌 ‘태권부대’에서 군인들에게 보급했으니, 역사적 기록을 놓고 보자면 태권도 ‘원조 논란’ 무의미하다시피하다. 최홍희가 군 장성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태권도 역사의 맨 앞자리에 서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홍희(국제태권도연맹 사단법인 ITF태권도협회 홈페이지)
최홍희(국제태권도연맹 사단법인 ITF태권도협회 홈페이지)

태권도는 최홍희에 의해 모슬포에서 군인들에게 보급된 뒤 다른 사단으로 확산되었고, 대한민국 모든 군인이 연마하는 무예로 급속히 성장한다. 최홍희는 이후 국문과 영문 태권도교본 작업을 하기도 하고, 태권도 계에서 입지를 다지며 태권도의 국제화를 위한 길을 걸었다.

최홍희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그를 빼놓고는 태권도의 시작을 말하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본격적인 태권도 교육의 시작점이 제주도 모슬포라는 점 역시. 하지만 ‘태권도 발상지’라는 위상에 비한다면 대우는 초라하다. 왜일까. 무엇보다 정치적 이유가 크다.

태권도 발상지인데...'초라한 대우' 이유는?

최홍희는 박정희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삶의 궤적이 조금 다르다. 최홍희는 일제 당시 학병 신분으로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하다가 붙잡혀 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반면, 박정희는 일제 만주 관동군 소위로 해방을 맞았다. 최홍희는 자신이 군인이었을 때 박정희가 자신을 각하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 이후, 사이가 벌어졌다. 군사반란 이듬해 군복을 벗었다.

최홍희는 1966년 3월에 창설된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로 취임했다. 태권도는 박정희의 공로로 선전되기 시작했다. 최홍희의 박정희 군사정권 대한 불만은 깊어갔다.(그는 회고록에서 박정희에 대한 독설도 늘어놓는다) 그는 당시 정권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눈엣가시였던 모양이다. 출국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다. 결국, 최홍희는 1972년 3월 독재정권의 탄압을 이유로 들며 캐나다로 망명했다. 그가 총재로 있던 국제태권도연맹도 캐나다 토론토로 본부를 옮겼다.

(사진=국제태권도연맹 대한민국협회 홈페이지)
(사진=국제태권도연맹 대한민국협회 홈페이지)

창시자가 망명을 떠나고 국제기구 본부도 옮겨갔으니 당시 정권과 태권도 계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앗았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직후, 대한민국 태권도 단체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에 대항할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된다. 초대 총재는 박정희의 경호를 맡았던 김운용이다. 이후 충격을 주는 일이 다시 일어난다. 최홍희가 북한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무술 수련은 이념으로부터 초월해야 하고, 한민족인 북한에도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함경북도 출신이다. 체제와 이념 불문 전세계 국가들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퍼트려왔다. 태권도 보급이 전부였던 그에게 남북을 가로지르는 철책은 무의미해졌을 터.

“빨갱이 소리를 들어가며 북한을 자주 다닌 것도 결코 남한보다 더 정들어서가 아니라 북한을 통해 올바른 태권도를 사회주의 국가와 제3세계에 보급함으로써 나의 꿈을 실현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태권도는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절대 정치적 목적으로 쓸 수 없는 국제무도임’을 뚜렷이 했던 것이다.”(최홍희)

최홍희는 태권도로 남북이 하나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의 뜻과 달리 북한과 남한은 태권도로 하나가 되지는 못했다. 국제 사회에서 태권도는 국제태권도연맹과 세계태권도연맹 둘로 완전이 나뉘어졌고, 북한 태권도와 남한 태권도는 각자 제 길을 걷게 된다. 최홍희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남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캐나다와 북한을 오가며 살다 말년에 북한에 암 치료를 받으러 갔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은 북한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되었다. 다음은 그가 죽은 뒤 북측 단체들이 발표한 부고일 일부다.

“선생은 해외에서 통일애국활동을 벌리는 기간 여러 차례 조국을 방문하여 위대한 주석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접견을 받고 자주정치와 민족대단결사상, 넓은 도량에 매혹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자애로운 어버이로, 조국통일의 구성으로 열렬히 흠모하면서 애국충정의 길을 걸어 왔다.”

이런 수준으로 북한 체제 선전에 이용되는 인사를 남한의 주류 태권도 계가 예우하고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홍희의 묘(국제태권도연맹 사단법인 ITF태권도협회 홈페이지)
최홍희의 묘(국제태권도연맹 사단법인 ITF태권도협회 홈페이지)

 

태권도에 덧씌워진 가짜 역사...'단군이 왜 거기서 나와?'

상황이 이렇다보니 남한의 주류 태권도 계에서는 태권도의 창시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한다. 세계태권도연맹 초대 총재인 김운용도 최홍희의 후배 세대다. 최홍희를 대체할 뾰족한 인물이 없다. 찾아낸 것은 민족 판타지이다. 단군신화까지 동원한다. 국기원은 홈페이지에 태권도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태권도는 단군 이래 우리 민족과 오랜 역사를 같이 해 온 한국 전통 무예이다. 한국 무예의 발달은 기원전 2333년 한반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면서 “삼국시대에는 무치주의(武治主義) 이념과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조되면서 태권도를 포함한 다양한 무예가 크게 발전하였다”고 쓰고 있다. 삼국시대에 태권도를 포함한 다양한 무예가 크게 발전했다고? 하지만 물론, 삼국시대는커녕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때도 ‘태권도’라는 무예는 없었다. 기록이 없다. 왜? 역사적 사실이 아니니까. 태권도라는 명칭은 최홍희가 지었으니까.

태권도를 전통무술로 추켜세우는 시도에 대해 이영권은 '조작된 신화'라고 일침한다.

“(최홍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휘호를 받고 '명칭제정위'를 통해 명칭을 제정한 때가) 1955년 4월 11일이라면 태권도의 역사는 기껏해야 50년(2005년 기준)이라는 말이 된다. 멀리 잡아 최홍희가 새로운 무도를 개발하기 위해 연구하던 1946년을 그 시작점으로 택한다 해도 태권도는 해방 이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민족고유의 전통무술이라는 건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이영권, 같은 책)

그렇게 전통이 유구했다면 어떻게 2018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대한민국의 국기(國技)로 태권도가 공식 지정되었을까. 냉정한 학자들은 한국의 전통무술은 씨름과 국궁 정도만 남아 있다고 평가한다. 현재 태껸마저도 일제 때 맥이 끊겼다가 복원된 '복원무술'로 평가되는 상황이다. 태권도가 들어설 '전통무술'의 자리는 없다.

'국뽕' 넘어선 '태권 제주'...과제는?

모슬포에는 ‘태권 부대’ 29사단 창설기념탑이 남아 있다. ‘주먹탑’으로 불린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1985년 11월에 모슬포 군 비행장을 방문할 때 깨부숴버렸다.

“전두환이 아니라 전경환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힘은 전두환 못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방문할 예정이라고 해서 그만 이 탑을 빠개고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소위 ‘친북인사’ 최홍의와 관련이 있는 탑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이영권, 같은 책)

태권도 유적이자, 국군 유적인 주먹탑은 20여년 전 발굴해 다시 복원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태권도의 발상지가 어떤 의미를 갖도록 할 것인지,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뽕'이 차오르는 '태권 성지'에 그쳐서는 아무래도 곤란하다. 국군 유적이라는 이유로 '안보 교육장 '노릇에 그쳐서도 안 될 일이다. 과제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현대무술'인 태권도의 역사 왜곡을 '당당하게'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가짜 전통을 보전하느라 골치를 앓을 시간에 차라리 모던한 동작 하나 더 갈고 닦는 것이 낫다. 그게 무도인의 길에 가깝다. 남한의 태권도 계가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하는 최홍희에 대한 재평가도 선행되어야 할 과제다.

최홍희에 대한 재평가...'태권도로 남북 평화 도모' 계승 필요

일본군을 탈출해 항일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일제에 붙잡혀 옥살이 중 해방을 맞고(당시 학병 출신 인사들은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여러 무술 유파를 통일해 태권도를 창시·보급하고, 박정희와 불화하다 캐나다로 망명, 캐나다 국적으로 북한을 비롯한 전세계에 태권도를 보급하다가 말년에 북한에서 숨을 거둔 뒤 혁명열사릉에 묻힌 최홍희. 숨 차다. 이런 인물을 계속 단편적으로 ‘친북인사’라는 테두리 안에 가둬두는 것이 합당할까.

최홍희가 초대 총재를 맡았던 국제태권도연맹이 주최하는 대규모 태권도대회가 2004년 제주도에서 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라이벌 단체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를 등에 업고 주류로 올라선 세계태권도연맹이 제주대회를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권도 창시자 최홍희가 친북인사니까 그가 태권도를 가르친 제주도가 부각되는 데 불편함이 따랐던 것일까. 이영권은 “2004년 태권도 발상지 제주에서 남북의 태권도가 세계인의 축복 속에서 그런 기회를 가졌더라면 참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태권도가 통일되면 조국도 통일된다’라던 최홍희의 외침 역시 외롭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 글에서 여러 차례 인용한 이영권의 책 <제주역사 다시보기-왜곡과 미화를 넘어>가 나온 지 17년이 넘었다.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글쎄. 국기원 홈페이지는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있고, 남북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됐다. 태권도를 통한 남북 관계 개선은 가능할까. 가능성은 있다. 국제태권도연맹과 세계태권도연맹이 남북태권도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를 위해 손을 잡았던 바 있다. 두 단체가 남북 간 관계가 좋던 2018년 북한 평양에서 협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한 번 잡았던 손을 다시 잡지 못할 이유도 없다. 물론, 이번엔 '태권도의 발상지' 제주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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