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소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투표소 자료사진. (사진=제주투데이DB)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일 투표소에 가면 유권자는 투표용지 2장을 받는다. 한 장은 자신이 지지하는 지역구 후보를, 나머지 한 장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도록 돼 있다. 후자는 비례대표 의석수를 결정하는 투표다. 지금이야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하지만 23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2000년까지의 총선거와 지방선거에선 유권자 한 명당 투표용지 1장만 주어졌다. 지역구 후보를 찍으면 그 후보뿐만 아니라 후보가 속한 정당도 찍게 되는 셈이었다. 지역구 후보의 득표수는 그 후보가 속한 정당의 득표로 계산해 비례대표 의석수가 결정됐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이 같은 선거제도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지역구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정당에 대한 투표로 간주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하는 것은 직접 선거의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두 개의 선거는 따로 구분돼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다. 고 노회찬이 ‘1인1표제’ 선거제도에 대해 위헌 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헌재의 판단이었다. 

이는 2004년 총선에서 신생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이 의석 10석을 확보하는 데 주요한 발판이 된다. 한국 사회의 선거 ‘제도’는 한걸음 더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뤄냈다.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최근 노회찬 5주기 즈음해서 그의 62년 인생을 ‘아카이브’한 책이 나왔다. 노회찬재단이 기획했으며 언론매체 미디어오늘과 레디앙, 노동과세계 등을 창간하고 편집국장을 지낸 이광호가 썼다. 

8일 오후 독립서점 한뼘책방과 제주투데이는 저자와 함께 하는 『노회찬평전』(사회평론 펴냄) 북토크를 진행했다. 

“정치야말로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최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큰 사업”이라 믿은 노회찬은 자신이 꿈꾸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의 삶을 선택했다. 

저자는 노회찬의 정치 활동 시기 중에서도 2000년과 2004년 사이를 주목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때만 해도 진보정당의 의석수는 ‘0’석이었다. 4년 뒤 2004년엔 ‘10석’이 됐다. 4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기적과도 같았던 ‘10석’이 가능했을까.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87년 6월 시민항쟁을 거치며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만들기 위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출범했고 노회찬은 중앙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198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노동조합에 대한 강경한 탄압에 나섰다. 이 때문에 노회찬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생활을 했다. 

‘인민노련’은 합법적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와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민중당과 통합했다. 1992년 3월 통합민중당은 당선자 없이 득표율 1.5%에 그치며 사실상 해산 수순을 밟았다. 

노회찬은 감옥에서 현대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통합민중당이 총선에서 참패하는 상황을 지켜봤다. 출소 후 독자적 진보정당 운동진영에 남은 사람들이 만든 ‘진보정당추진위원회’(이하 진정추)에 함께 했다. 진정추는 같은 해 독자 정당 노선을 지지하는 조직과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무소속 백기완 후보를 내세웠으나 결과는 득표율 1%. 의미 있는 지지율을 기대했으나 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3년 노회찬은 진정추의 2대 대표를 맡았다. 그는 통합민중당이 실패한 과정을 복기하고 주요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첫째, 진보진영의 다양한 정파들이 함께하지 못했고 둘째, 정당의 주요 기반이 될 노조 등 대중조직의 공식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으며 셋째, 진보진영에 불리한 제도적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 1996년 12월27일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돌입,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KBS뉴스 방송 화면 갈무리)
지난 1996년 12월27일 민주노총 산하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돌입,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KBS뉴스 방송 화면 갈무리)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 진보정당’은 비현실적인 헛구호로만 느껴졌던 시기. 외로운 싸움을 이어나간 노회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대형 사건이 터졌다. 1996년 12월27일 새벽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해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이 개정안엔 정리해고, 파견근로,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등이 담겼다. 

이에 민주노총은 같은 날 오후부터 즉각 전국 총파업에 돌입했고 이 파업은 이듬해 1월18일까지 계속됐다. 민주노총 조합원 81.1%, 연인원 360만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한국 노동자들이 정치적 이슈로 총파업에 나선 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회찬은 통합민중당이 실패한 원인 두 가지(첫째와 둘째)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바로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을 대통령 후보로 만드는 일’이었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이야말로 21세기 한국 최대의 히트 상품이 될 것”이라며 권영길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렇게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적 공식 지지를 얻는 첫 진보정당 ‘국민승리21’이 탄생했다. 이는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마흔네 살.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노회찬의 인생 목표의 절반이 해결됐다. (남은 절반은 ‘진보정당의 집권’이었다.)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했다. (사진=노회찬재단 홈페이지)
지난 2000년 민주노동당이 출범했다. (사진=노회찬재단 홈페이지)

1992년 통합민중당이 참패한 원인 중 두 개의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마지막 남은 과제는 진보정당에 불리한 선거제도. 노회찬은 ‘1인1표제’의 위헌법률심판 청구라는 카드를 꺼냈다.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나오자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1인2표제’가 도입됐다.

노회찬은 철저하게 ‘1인2표제’를 활용한 선거 전략을 세웠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 광역단체장 선거에 모두 후보를 내기로 했다. 선거 유세 기간 후보들은 ‘우리 당에 투표해 달라’고 호소하며 ‘1인2표제’를 적극 홍보했다. 그 결과 기초의회의원은 31명이 당선됐고, 광역의회의원은 11명 당선 됐는데 이중 9명이 비례대표 후보였다. 정당 득표율은 8.1%를 기록했다.

이는 같은 해 대선 후보 방송사 합동토론회에 권영길 후보가 입장권을 따내는 발판이 됐다. 그해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득표율 3.9%를 기록, 5년 전보다 세 배 이상 높은 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2004년 4월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1960년 4월 혁명 직후 치러진 총선 이후 44년 만에 처음으로 진보정당 의원 10명(비례대표 8명)이 탄생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노회찬재단 아카이브)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로 들어가고 있다. (사진=노회찬재단 아카이브)

이날 북토크에서 이광호 작가는 노회찬 부모가 한국전쟁 시기 피란해, 거제를 거쳐 부산에 정착한 이야기부터 노회찬의 학창 시절, 경기고에 다니며 반독재·민주화를 가슴에 품게 된 계기,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삶, ‘진보정당의 지속’을 위해 선택한 ‘삶의 중단’까지 노회찬의 일생 전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작가는 “노회찬은 가장 진보적인 이념이 ‘휴머니즘’이라며 자신이 휴머니스트라 불리는 게 좋다고 한 사람”이라며 “그는 착한 사람을 돕자는 게 아니었다. 고통 받는 다수를 위한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한 정치인이었다”고 표현했다. 

‘노회찬 평전이 너무 빨리 나온 게 아니냐’는 질문에 이 작가는 “이 책은 노회찬 ‘첫 번째’ 평전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앞으로 계속 노회찬의 정치는 무엇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에 답하는 책은 계속 나와야 한다”며 “다만 그의 62년의 삶을 기술하는 건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서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답했다. 

또 “오늘날 현안을 두고 노회찬은 뭐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아마도 ‘당신들의 언어를 찾으라’고 하지 않았겠느냐”며 “노회찬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그의 꿈을 봤으면 한다. 정권을 바꾸긴 쉽다. 일상을 바꾸는 건 진짜 어렵다. 공기를 바꿔야 한다. 노회찬은 진보정당이 장기 집권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봤다”고 강조했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 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꿈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회찬의 약속』 (레디앙 펴냄, 2010) 중에서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8일 오후 제주시 이도이동 한뼘책방에서 이광호 작가와 함께하는『노회찬평전』북토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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