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관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학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관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학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시물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일본 오사카)코리아타운에 가면 몸(‘모자반’의 제주어)과 지름떡(‘기름떡’의 제주어)을 팔아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냥 해초이고 그냥 떡이지만 제주 사람들은 딱 알아보죠.”

지난 7일 오전 일본 오사카공립대학교 스기모토 캠퍼스 문학부동 246교실에서 문학연구과 이지치 노리코(伊地知 紀子) 교수가 ‘20세기 제주 사람들의 국제 이동과 국경을 넘는 삶’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이 올해 하반기 신설한 4·3융합전공 과정의 일환으로 이 과정에 참여하거나 참여를 희망하는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마련됐다. 

제주사람들이 즐겨 먹는 식자재와 먹거리가 일본 오사카에 있는 시장 매대에 올라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주사람들이 꽤 오래 전부터 이곳을 거점으로 살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오사카에 거주하는 재일코리안 중 제주인의 비율은 남한 지역 중 가장 높다.

1934년엔 20% 이상이었고 1974년엔 36%, 2010년엔 39%를 차지한다. 특히 1930년대 중반경엔 재일제주인의 수가 약 5만명까지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4수준이었다. 100년 전 그 많은 제주인들은 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을까. 

재일코리안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츠루하시 상점가에 '제주'라는 식당이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재일코리안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츠루하시 상점가에 '제주'라는 식당이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외국으로 여행하는 것은 21세기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한국인에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무비자 또는 도착비자로 여행할 수 있는 국가는 180여개(2018년 The Henley & Partners Visa Restrictions Index 통계)에 이른다. 비자 자유도가 세계 3위 수준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있기 전, 1948년 8월 이전엔 어땠을까. 물론 그 당시에도 여행 중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가 존재했지만 이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엔 조선인이 외국으로 건너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물론 지금의 비행기나 대형 여객선 같은 편리한 이동수단이 없기도 했지만 제도적으로도 출입을 제한하는 장치가 존재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여행 단속에 나선 건 1919년 4월부터인데 직전 달에 발발한 3·1운동에서 조선 내 운동과 국외 운동이 결합한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후 ‘여행증명서’ 제도가 폐지되기도 했지만 ‘도항증명서’와 같은 제도가 다시 생기면서 여전히 조선인의 해외 출입국을 제한했다. 
 

‘메리야스의 월정’, ‘인쇄의 행원’, ‘고무의 조천’

“제주도가 마을 공동체가 강하지 않습니까. 여기 오사카에서도 그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요. 타나마치 욘초메엔 행원 사람들이 살고 텐노쿠엔 김녕 사람들이 살고 코리아타운 주변엔 법환 사람이 살고... 처음에 정착한 사람이 다음에 오는 동네 사람에게 옆집에 살라고 소개하고, 자기가 다니는 공장을 소개하는 식이었던 거죠.”

지난 7일 일본 오사카공립대학교 스기모토 캠퍼스 문학부동 246교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화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일본 오사카공립대학교 스기모토 캠퍼스 문학부동 246교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화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10년대 도일한 조선인은 망명한 정치인이나 유학생을 제외하곤 남성은 대규모 토목 공사, 여성은 방적공장에 고용돼 일본에서 거주했다. 1910년부터 일본이 한반도에서 실시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해 많은 수의 농민들이 경작지를 잃어 생계를 이을 수단이 필요했고 일본의 입장에선 러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한 철도 공사와 발전 시설 공사에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에서 공장이 거의 멈추다시피 하자 일본 방직·방적 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방직공장에서 일을 할 다수의 여성노동자가 필요했다. 제주 해녀들이 일본으로 ‘출가노동’을 간 공식적인 첫 기록은 1903년이다. 이지치 교수에 따르면 남성 어민들이 먼저 일본 쪽으로 진출했다가 그 영향으로 해녀들도 가기 시작했다. 일본 해녀와 비교해 제주 해녀의 임금 수준은 1/3정도에 불과했다. 일본 고용인 입장에서 적은 삯으로 일을 더 잘하는 제주 해녀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오사카와 제주를 오가는 직항 선박 ‘군대환’이 취항하면서 더욱 많은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미리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나중에 들어오는 동향 사람들에게 일본에서 거주하는 하숙집을 소개하거나 근처 집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같은 일자리를 소개해줬다.

그러다 보니 제주마을 공동체가 일본에서도 모여 살고 같은 직종에서 근무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메리야스의 월정’, ‘인쇄의 행원’, ‘고무의 조천’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1934년 조사에 따르면 제주 출신 일본 도항자의 직업은 남성의 경우 고무공, 철공, 유리공, 법랑공, 성냥공 등이며 여성의 경우 방적공과 해녀 등이다. 

일본 오사카 츠루하시 상점가 매대에 한국인이 즐겨 먹는 반찬이 진열돼 있다.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일본 오사카 츠루하시 상점가 매대에 한국인이 즐겨 먹는 반찬이 진열돼 있다.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또다시 일본으로

“제가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제주분들이 해방 후에도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걸 알게 됐을 때였어요. 특히 밀항해서 오신 분들. ‘너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바다를 건너오셨을까’가 궁금했어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일제 패전 이후엔 해방된 조국을 향해 일본에 살던 많은 제주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귀향 이후의 삶은 기대했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정은 조선인들이 일본을 나갈 때 1000엔을 초과하는 재산을 가져갈 수 없도록 제한했다. 당시 1000엔은 가족 4명이 제주에서 두 달 정도만 생활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1925년 오사카축항에서 조선으로 귀송되는 조선인. 사진은 오사카 코리아타운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1925년 오사카축항에서 조선으로 귀송되는 조선인. 사진은 오사카 코리아타운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해방 당시 제주도 인구가 약 22만명이었는데 직후인 1946년 인구수는 28만명으로 증가했다. 1년 새 인구가 25%이상 급증하고 일본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만큼의 충분한 재산을 갖고 들어오지 못한데다 식민지 경제가 해체되면서 일본으로의 수출이 막혔다. 이로 인해 일자리는 부족하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심각한 식량난에 맞닥뜨렸다. 거기다 콜레라까지 유행하면서 제주에서의 삶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꿈꿨던 ‘해방 이후의 삶’과 전혀 달랐을 테다. 

또 해방 이전에 일본에서 태어났거나 수십년을 적응하며 살았던 이들에겐 제주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익숙하지 않을 수 있었다. ‘조선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하고 ‘조선 문화’를 낯설어 했던 사람들이 고국에서 또다른 차별에 직면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리고 제주에선 1947년 3·1기념대회와 3·10총파업, 1948년 ‘4·3 봉기’가 일어났다. 

그렇게 많은 제주인들은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이유로 ‘살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향했다. 이는 ‘밀항’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을 점령했던 미군정이 본국으로 귀환했던 조선인들의 일본 재입국을 ‘외국인등록령’에 근거해 엄격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정 점령 기간 남조선에서 일본으로 밀입국한 사람들은 ‘적법’하게 입국한 사람 수와 비교해 10배 이상 많았다.(1949년 1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공식 입국한 남조선 사람들은 501명인데 반해 1949년 밀입국자 수는 1만명에 이르렀으며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밀항, ‘불법’과 ‘생존’ 사이

1965년 한일수교가 이뤄졌지만 1980년대까지 일본으로의 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이지치 교수는 “해방 전부터 형성됐던 생활권 속에서 제주사람들에게 도일은 연속적인 것”이라며 “다양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남한에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고 실감할 수 있었던 80년대까지는 사람들에게 ‘밀항’이라는 행위는 ‘불법성’ 이전에 경제적·사회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동수단’의 성격이었다”고 강조했다. 

1930년대 제주도 산지항부두에서 일본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제주로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오사카 코리아타운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1930년대 제주도 산지항부두에서 일본으로 가려는 사람들과 제주로 돌아온 사람들을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 오사카 코리아타운역사관에 전시돼 있다. 2023년 12월7일 촬영. (사진=조수진 기자)

그러면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밀항 사례를 설명했다. 현OO씨(1928년생)는 일본에서 출가노동을 했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1940년 일본으로 갔다가 태평양 전쟁 중 어머니와 함께 제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제주에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자 어머니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고 현씨도 뒤따라 밀항했다. 

양OO씨(1937년생)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나 해방 직후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갔다. 아버지가 1947년 3·1기념대회에 참가했다가 공권력 탄압에 위협을 느끼고 먼저 일본으로 밀항했다. 양씨는 1955년 부산을 통해 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조총련 소속이었던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 결국 함께 살지 못했다. 

고OO씨(1930년생)는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사업으로 부유하게 생활했다. 해방 이후 가족과 함께 제주로 왔으나 일본에서와는 달리 어려웠던 생활 형편에 적응하기 힘들었다.(미군정이 조선 귀환자에 대해 반출 재산을 제한했기 때문) 고씨는 공부에 매달렸고 무장대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이 걱정돼 일본으로 밀항을 가게 했고 본인은 끝내 제주에서 딸 대신 학살 당했다. 고씨는 일본에서 조총련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항상 ‘제주도를 위해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OO씨(1920년생)는 1935년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방적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다 병이 생겨 1938년 귀향했다가 1942년 남편의 학비를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44년 남편이 졸업하자 귀향했고 부부는 함께 남로당에서 활동했다. 1948년 물자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첫 밀항’을 다녀오다 붙잡혀 경찰에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 남편이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사망하자 다시 일본으로 밀항을 갔다가 붙잡혀 오무라 수용소를 거쳐 1950년 한국으로 강제송환됐다. 이씨는 1951년 또다시 일본으로 밀항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 

위 사례에서 소개하는 네 명 모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밀항’을 선택했지만 그 이유는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어떤 이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는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또는 붙잡혀 고문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에 올랐다.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양국은 1966년부터 재일코리안을 대상으로 협정 영주 신청을 받았다. 이를 위해선 한국 국적을 신청해야 했는데 당시 영주권 신청을 추진하는 민단과 이를 저지하려는 총련 간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왼쪽 사진 현수막엔 "기한 지나 후회말고 영주권을 빨리 신청하자"라는 문구가, 오른쪽 사진엔 "영주권신청은 영죽을신청 자식잃고 재산잃고 집안망한다"는 벽보가 붙어있다. 이 두 사진은 같은 시기 재일코리안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 이쿠노구 거리를 촬영한 사진으로 오사카 코리아타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1965년 한일수교 이후 양국은 1966년부터 재일코리안을 대상으로 협정 영주 신청을 받았다. 이를 위해선 한국 국적을 신청해야 했는데 당시 영주권 신청을 추진하는 민단과 이를 저지하려는 총련 간 공방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왼쪽 사진 현수막엔 "기한 지나 후회말고 영주권을 빨리 신청하자"라는 문구가, 오른쪽 사진엔 "영주권신청은 영죽을신청 자식잃고 재산잃고 집안망한다"는 벽보가 붙어있다. 이 두 사진은 같은 시기 재일코리안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 이쿠노구 거리를 촬영한 사진으로 오사카 코리아타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안주의 땅을 찾아서’ 일본으로 건너왔지만 밀항 이후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도 아니었다. 취직에서부터 일상에서도 차별을 견뎌야 했다. 이지치 교수에 따르면 재일코리안(4세)이 대기업에 취직을 한 건 2000년즈음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현실은 재일동포 사회에 더욱 큰 불안을 가져왔다.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국적을 선택해야 했던, 경계에 놓이기도 했다. 

‘불법입국자’ 또는 ‘불법체류자’라는 표현으로 이들의 삶을 단순화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에 ‘불법’이라는 딱지를 쉽게 붙일 수 있을까. 이는 전쟁을 피해,  터전을 떠나 국경을 넘어야만 하는 오늘날 ‘난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다. 

지난 7일 일본 오사카공립대학교 스기모토 캠퍼스 문학부동 246교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화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7일 일본 오사카공립대학교 스기모토 캠퍼스 문학부동 246교에서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학 문화연구과 교수가 4·3융합전공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지치 노리코 오사카공립대 문학연구과 교수는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어머니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70~80대 재일제주인 인터뷰 등을 통해 ‘재일코리안 1세대 여성들의 생활사’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내고 이듬해 제주 구좌읍 행원리에서 머물며 필드워크를 진행, 이를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 ‘생활세계의 창조와 실천-한국 제주도 행원리의 생활지’를 냈다. 지난 4월에 개관한 ‘오사카 코리아타운 역사자료관’ 창립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국내 번역된 저서로는 <일본인학자가 본 제주인의 삶>(2013, 경인문화사), 공저로는 <비판적 4·3연구>(2023, 한그루) 등이 있다. 

※참고 문헌

1. 『재일제주인의 생활사1: 안주의 땅을 찾아서』,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선인, 2012.  

2. 『재일제주인의 생활사2: 고향의 가족, 북의 가족』,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 선인, 2015. 

3. 『재일조선인 역사 그너머의 역사』,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한승동 옮김, 삼천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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