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고사리 장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년 이맘때쯤에도 비가 이 정도만 내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비가 고사리 장마로 작년과 다르지 않은 비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올겨울 제주에 비가 많이 내린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때는 일주일 내내 비가 내리며, 겨우내 비가 끊이지 않고 많이도 내렸습니다. 

겨울에 바람이 많이 불고, 춥고, 건조하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비가 자주 내리고, 습한 날씨가 연속이니 농민으로서는 농작물이 우선 걱정입니다. 농작물이 걱정되는 것은 농민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인 저조차도 이런 날씨에는 우울감에 빠져 있게 됩니다. 봄이 되니 해가 쨍하게 났으면 좋겠고, 새들이 부지런히 지저귀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비가 종일 내리고 있습니다. 

어제는 외출하는 길에 해가 잠깐 났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도롯가 유채꽃이 활짝 핀 곳에 지나던 상춘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꺄르륵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잠깐이나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몇 년 전 완두꽃이 피었을 때 완두밭 풍경. 해를 거듭할수록 완두농사조차도 어려워지고 있다. (사진=김연주)
몇 년 전 완두꽃이 피었을 때 완두밭 풍경. 해를 거듭할수록 완두농사조차도 어려워지고 있다. (사진=김연주)

완두꽃이 필 계절입니다. 완두는 농민 1년차부터 재배하고 있는 저의 주력 작물입니다. 해마다 가을에 심고 봄이 되면 수확하고 있습니다. 육지에선 얼었던 땅이 녹는 3월이 되어서야 파종을 하지만 이곳 제주에선 작년 가을에 심었으니 겨울에도 조금씩 자라다가 3월이 되면 꽃을 피웁니다. 꽃을 피운지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꼬투리가 달리고 맛있는 풋완두를 수확할 수 있습니다. 

완두를 수확할 때는 봄 햇살이 뜨겁습니다. 완두를 수확하려면 줄기를 밭에 둔 채로 꼬투리를 하나하나 따야 합니다. 뜨거운 햇살에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풋완두는 소비자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하우스에서 재배한다 해도 5월이 돼야 나오는 경우가 많고 육지의 완두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저의 완두는 생산되는 양을 거의 직거래로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뜨거운 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완두를 딸 때는 힘이 들어 “내년에는 조금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해마다 합니다. 그러나 작년 가을에는 완두를 여느 때보다도 많이 심었습니다. 심을 때는 “내년 봄만 되어봐라. 완두를 많이 생산해서 소비자들에게 맘껏 판매해야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저 멀리 완두꽃이 하얗게 폈습니다. 이쪽 마늘밭에 검질을 매면서도 완두꽃을 보니 흐뭇해졌습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완두밭의 완두는 안녕한 줄 알았습니다. 손님이 밭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완두는 안녕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완두 줄기는 겨우내 잦은 비로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왕성하게 분얼(가지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하고 튼실하게 자라, 하얀 꽃을 예쁘게 피우고 있는 중인 줄 알았습니다. 

몇 년 전 완두꽃이 피었을 때 완두밭 풍경. 밭 가장자리 볕이 잘드는 곳에 완두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진=김연주)
몇 년 전 완두꽃이 피었을 때 완두밭 풍경. 밭 가장자리 볕이 잘드는 곳에 완두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진=김연주)

완두가 이렇게 처참하게 녹아내린 것은 농사 평생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연재배 밭은 풀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에 물빠짐이 좋습니다. 비가 와도 물이 오래 고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완두가 습한 날씨를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녹아내리는 완두 줄기를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녹아내리듯 아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완두만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봄기운이 소생하는 것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작물이 쪽파입니다. 그런데 올해 쪽파는 가느댕댕하고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잦은 비 때문에 쪽파가 힘을 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일찍 찾아온 한파에 월동무가 바람이 들었고, 미처 수확하지 못한 귤나무의 귤들이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겨울 잦은 비에 파종해 둔 보리는 누렇게 뜨고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완두와 쪽파는 줄기가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해를 거듭해도 새로이 맞이하는 상황들 투성입니다. 10년 차 농민임에도 불구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쉬워지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작년은 그나마 쉬운 한해였습니다. 내년에는 더 여러워질 것이 뻔해 보입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해가 쨍하고 났으면 좋겠습니다. 밭으로 나갈 모종이 대기 중입니다. 양배추도 심어야 하고, 브로콜리도 심어야 합니다. 양배추와 브로콜리 옆으로는 봄 당근도 조금 심고, 비트와 콜라비도 조금 심어보고 싶습니다. 또 기온이 올라 감자싹이 잘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완두도 어려운 가운데 힘을 내줬으면 합니다. 

말하고 보니 완두와 농민이 닮은 듯합니다. 해마다 어려움을 겪음에도 힘을 내야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어렵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당연히 힘을 내야지요. 힘을 내고 우선 말해봅니다. 해를 비춰주세요. 

김연주.
김연주.

전업농이 된 지 6년 차. 농민으로 살면서 느끼는 일상을 가볍게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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