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은 제주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생활의 터전이다. 제주사람들은 오름 자락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뼈를 묻어왔다. 신앙의식의 터였으며, 숱한 신화도 피워왔다.

오름은 제주방언으로 봉우리. 한라산의 기생화산을 의미한다. 그 수가 368개로 '제주'라는 하나의 섬이 가진 기생화산 수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사라악·동수악·물찻 등 9개 오름에는 화구호(火口湖·칼데라)가 있다. 이른 바 산지 늪이다. 남원읍 수망리에 있는 물영아리는 습지보전법이 제정된 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습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한라산 1100고지의 산지 늪도 신비의 대상이다.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데다 늪 주변은 습지 식생지역으로 유명하다.

비와 바람, 폭풍, 눈보라, 안개, 일출, 저녁놀 등의 자연현상과 어우러진 산정 화구호는 보는 이의 감정에 따라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제주의 색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 오름 산정 화구호에 올라 보라. 그곳에는 '생태계의 고문서'가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화산이 폭발할 때마다 화산재가 쌓여 이루어진 '작은 백록담'이다.

특히 산정 화구호, 산지 늪은 내륙과는 다른 학술적·경관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일대는 평지대의 습지와 달리 상대적으로 낮은 기온과 함께 각종 원시식물들이 수천년 동안 썩지 않은 채 퇴적층(이탄층)을 이루며 쌓여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산지 늪은 수많은 생명체를 잉태하고 있다. 작은 우주다. 실뱀, 유혈목이, 무당개구리, 도롱뇽이 살고, 천마·새우난초·금새우란 같은 개체 수가 희귀하고 분포역이 줄고 있는 식물들도 눈에 띈다. 개족도리·사위질빵·새끼 노루귀는 특산식물이다.

그러나 생태계의 보고(寶庫), 산지 늪은 그 희소성에도 불구하고 내륙화가 진행되면서 습지 특유의 생태적·문화적 기능이 상실되고 있다.

일부 동·식물은 멸종위기까지 내몰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물장오리와 동수악이다. 한라산 1100고지 일대 산지 늪도 주변 식생이 발달하고, 기저(基底)층으로 토사가 유입되면서 수십년 내로 내륙화가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산지 늪 탐사가 이뤄진다. 유유자적 풀을 뜯는 소 떼를 뒤로하고 정상에 오른다. 바람이 세차다. 독특한 감흥이 인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산지 늪은 새로운 삶의 의욕을 솟게 한다. 산지 늪, 그 얼마나 낮선 미학인 지….

▲ 장마철 멀리 구름에 잠긴 오름들을 뒤로 한 어승생악 화구호에 물이 가득 고여 장관을 연출한다.<김영학 기자>

▲ 평소 거의 말라붙었던 동수악 화구호는 장마철 큰비가 내린 후 호수의 면모를 갖춘다.<김영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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