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탄압에도 전패 모신 정의골 유생들

장수당에서 귤립원, 오현학원 설립 밑거름

조선시대 이 고장의 교육기관으로는 지금으로 '국립'인 향교와 '사립'인 서원(書院)이 있었으며, 그 외에 각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다.

나라에서 세운 향교에는 그 당시 국교가 유교였던 데서 공자와 그의 제자, 그리고 유명한 유학자들을 대성전에 모시고, 예를 배우면서 명륜당에서 공부를 했다.

한편 서원은 조선 중엽부터 보급된 유생들의 사학기관이었다. 선비들이 모여 명유(名儒) 현신(賢臣)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일반 자제들을 모아 주자학(朱子學)을 강론하며 서적 출판과 보존도 했다.

제주목에 향교가 태조 3년(1394)에 세워졌다는 것은 앞서 '조선 초기의 제주도'에서 기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줄인다. 정의향교는 그보다 늦게 태종 16년(1416) 정의현이 설치되면서 지금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했었다. 세종 5년(1723) 현청을 성읍리로 옮길 때 향교도 함께 옮겼다. 처음에는 서문밖에 건립했으므로 지금도 거기를 향교골이라 한다. 헌종 15년(1849)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조선시대 어느 골이나 객사에는 임금님의 상징인 전패('殿'자를 쓴 패, 이것으로 임금을 상징했다)를 모시고 있었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객사도 없어졌지만 일제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가 영 껄끄러운 존재였다.

일제는 순사들에게 전패를 모아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 안 정의향교의 유생들이 밤에 몰래 이 전패를 향교로 옮겨 모셨다. 이 일이 발각되어 정의골 유생들이 일본 경찰에게 잡혀가 경을 쳤다. 그러나 이 전패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이 향교 안에 모셔져 있다. 그것은 어쨌든 정의고을 선비들의 기개를 보여주며
지금도 긍지로 살아있다.

대정향교도 같은 해 현이 설치되면서 북성 안에 설치됐다. 이 향교도 두 차례 옮긴 끝에 효종 4년(1653년) 이원진 목사에 의해 현재의 단산 밑으로 옮겨졌다. 그 후 200년 가까이 흘러서 1840년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대정현에 유배를 오고, 여기서 9년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이곳 향교 선비들이 공부하는 방에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을 걸어줬다. 이 현판은 지금 추사 유배지의 '추사관'에 전시돼 있다.
필자는 1987년 '제주의 마을' 작업을 하는 과정에 '경신재(敬信齋) 첨학전(瞻學錢) 절목(節目)'이라는 자료 하나를 찾아냈다. 경신재는 '쉬지 않고 공부하는 집'이라는 뜻의 장수당(藏修堂)의 후신으로 탐라지 같은 데는 '경신재-일명 장수당'이라고 기록돼 있다. 첨학전 절목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장학규약'이다. 그 내용은 당시 대림 경에 밭 하나가 있는데, 그 세가 신통치 않으므로 밭을 팔아서 그 대금 2백 냥을 신용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로 학생들의 반찬비용을 쓰고, 나머지 두 냥은 하인의 의복대로 지출할 것 등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제정한 것은 1881년 신사년 11월이었다.

선조 11년(1578) 조인후(趙仁後) 판관이 위의 충암묘(庶庵廟)를 세우는데, 중종 16년(1521) 제주에 귀양왔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충암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김정은 중종 14년(1519) 을묘사화(乙卯士禍) 이전 조광조 등과 더불어 개혁을 시도하다가 화를 입고 제주에 귀양왔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중종 16년 10월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는 제주 유배 중에 탁월한 인상기인 <제주풍토록>을 썼으며, 그가 죽기에 앞서 읊은 "아! 천추만세에 응당 나를 슬퍼하리라"는 '절명사(絶命辭)'는 대단한 절창이다.

그가 죽은지 57년만에 충암묘가 서고,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제주 선비 김진용(金晉鎔)이 건의하여 장수당이 섰으며, 이것은 다시 경신재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현종 6년(1665) 최진남(崔鎭南) 판관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긴 다음 이를 사(祠)로 하고, 장수당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 되었다. 이것이 나중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규암 송린수, 우암 송시열까지 포함하여 '오현(五賢)'이 되었으니 모두 귀감이 되는 어른들이었으며, 이 자리는 오현중학교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수만 인재를 기른 오현학원을 이룩하는 기초가 됐던 것이다.

삼성사(三姓祠)는 숙종 24년(1698) 삼성혈 동쪽에 삼을나묘(三乙那廟)를 세웠는데, 여기 1740년 재생(齋生)을 두면서 서원으로 발전했다. 한때 학생 수가 100명에 이르렀으나 언제부턴가 가르치는 기능이 차츰 사라졌으니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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