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8월 15일 구좌읍 상도리에 세워진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정부가 '전문사료 발굴분석단'을 구성하고 국가보훈처에서 사회주의 계열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 재평가 작업을 벌일 방침인 가운데 지난해 사회주의 운동을 이유로 독립유공자에서 탈락한 '세화리 해녀항쟁' 주도자의 유공자 인정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좌우를 떠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따라 내년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 작업을 벌일 방침이라고 27일 밝혔다.

또 보훈처는 이를 위해 관련 학자와 연구원 등 민간 전문가 10명으로 구성된 전문사료 발굴분석단을 내년 초쯤 발족, 좌익계열이란 이유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온 독립유공자를 적극 발굴하고 선정기준을 마련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8월경 세화리 해녀항쟁을 주도했던 해녀 김옥련 옹 등 4명이 독립유공자나 포상을 받게되며 정부가 해녀항쟁을 항일운동으로 인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정부는 좌익 운동 이유와 행적이 묘연하는 등 기록불충분을 이유로 세화리 해녀항쟁을 뒷받침한 혁우동맹원(이후 민중운동협의회) 주동자 신재홍 옹 등을 유공자 선정에서 탈락시켰다.

즉, 혁우동맹 사건으로 제주의 운동가 40명이 체포됐는데 이 가운데 38명이 최고7년형을 받는 등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혁우동맹의 항일 활동에 대해서는 제대로운 평가를 받지 못해왔다

국가보훈처는 혁우동맹을 이끈 신재홍 옹의 선정 탈락에 관해 △활동 이후 행적 불명하다는 이유를 들었고 '해녀'노래를 만들어 배포한 강관순(혁우동맹원) 옹에 관해서는 △사회주의 활동의 평가문제(조선공산당 관련 활동) 등을 들었다.

또 같은 혁우 동맹원 김성오 옹에 관해서는 △사회주의 활동의 평가문제(조선공산당 관련 활동), △광복후 행적 문제 등을, 김순종(혁우동맹원) 옹에 관해서는 △광복후 좌익 활동 등을, 한향택(혁우동맹원) 옹은 △활동 후 행적 미상 등을 들어 유공자로 선정하지 않았다.

해녀항쟁기념사업회 김전근 위원장은 그러나 "김성오, 김순종 선생은 호적 상 문제도 없고, 광복 이후 행적에 관한 자료가 있다"며 "지난해 유공자로 선정된 문도배 옹도 사회주의 활동을 했는데 이들에 관해서는 탈락시킨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해녀 김옥련 옹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며 혁우동맹원 활동을 한 문도배 옹도 같이 선정했는데 문 옹은 해방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따라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며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입법의원으로 당선돼 건국준비위원회에 활동했다.

그러나 김전근 해녀항쟁기념사업회 위원장은 지난해 탈락한 혁우동맹원 △신재홍 옹 △강관순 옹 △김성오 옹 △한향택 옹 △김순종 옹 등과 추가로 △부덕량 옹 △채재오 옹 △한문옥 옹 △김여찬 옹 △부승림 옹 등 모두 10여명을 올해 국가유공자 심사에 신청할 계획이다.

이가운데 부덕량 옹은 보훈처에서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요구할 만큼 항일 독립 투쟁 공적을 인정 받고 있다.부 옹은 구좌읍 하도리 출생으로 해녀들을 상대로 야학을 가르치며 해녀항쟁을 뒷받침했으며 이후 '폭력행위'혐의로 일제의 재판소에서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또 최재오 옹은 종달리 태생으로 혁우동맹원이며 해녀항쟁 이후 10개월의 징역을 상았다. 이밖에 한문옥.김여찬.부승림 옹은 모두 하도리 출생으로 모두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들은 해녀항쟁 이후 다시 제주로 돌아와 사망했기 때문에 호적상의 문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게 기념사업회의 입장이다.

이와 관련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기념사업에서 유공자 신청을 해 올 경우 충분히 검토할 방침"이라며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루지는 만큼 여운형, 조봉암 등 폭넓게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혁우동맹은?

해녀와 청년들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시 제주도에서의 좌익의 동향을 살필필요가 있다.

이 조직은 1930년 3월 1일 세화리의 문도배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한편 이무렵 전당적 좌익 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발견된다.

그리고 혁우동맹은 1930년 9월 20일 농촌청년, 해녀의 획득과 해녀 본위의 조합설립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해녀와의 관계수립을 목표로 한 방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혁우동맹은 동년 10월 성산포 분쟁에 격문을 살포하며 해녀쪽에 접근해 갔다.

그런데 새해들어 1931년 1월 하순에는 목적수행상의 효과가 적었고 또 발각의 두려움이 있다느 이유로 갑자기 해체가 협의되었다. 이것은 당시 전도적으로 공산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혁우동맹은 결국 <조선 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가 결성된 후 얼마되지 않아 해산된다.

혁우동맹은 이에 따라 해산되었지만 전도적인 조직에 앞서 구좌면에서 좌익청년들의 결사가 존재하고 있었고 혁우동맹의 활동은 그대로 구좌면을 중심으로 한지역에서의 당 재건운동으로 인계되고 있다.

청년들의 조직화가 급진전 되고있던 지역에서 해녀투쟁이 전개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역시 양자의 인과관계를 살필 수 있다.


대표적 인사 약력


△신재홍 옹
-독립운동가
-기독교인, 기독교 학교 교사로 민중계몽과 민족자주독립심 고취
-민족주의자며 사회주의자로 제주도통합청년회 조직
-조선공산당 당원
-항일 투쟁 비밀결사 혁우동맹 조직 총책
-제주해녀사건으로 검거, 징역 7년형

△강관순 옹
-독립운동가, 조선일보 기자
-야학소 교육을 통한 부녀자들에게 한글교육과 민중계몽 고취
-혁우동맹 핵심원
-제주해녀항일운동 당시 검거, 징역 2년6개월형
-옥중에서 해녀노래 작사, 유출해 항일민족정신 고취

△김성오 옹
-보통학교 교사와 야학소 통해 문맹퇴지 및 구습 타파 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운동 전개
-혁우동맹 바밀결사 가담
-해녀들의 투쟁 기금 및 독립군 기금 지원
-해녀항쟁 사건 이후 배후조종 및 독립운동으로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6개월 복역

△한향택 옹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혁우동맹원
-독립군 군자금 지원
-제주해녀항일운동사건 당시, 혁우동맹이 탄로, 검거, 2년에 집행유예 4년 선고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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