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메스컴들은 이명박대통령의 신년인사를 소개하면서 한일합방 백년에는 언급이 없었다고 주석을 달았다.

미묘한 한일관계의 백년사에 언급해서 신년초부터 잘못 나가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아전인수격인 해설도 덧붙였다.

일본 메스컴의 비약적인 논리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치욕적인 한일합방후 조선이라는 국명은 일본인들에게 경멸의 상징적인 차별 단어로 둔갑했다.

그러나 백년후인 2010년 1월 6일자 신문은 그 양상이 달랐다.

조선이라는 단어가 그 어느 기사 글자보다도 크고 돋보이게 일간지와 스포츠신문에 게재되었고 찬양 일색이었다.

총련계 민족학교 오사카 조선고등학교가 제89회 일본전국럭비대회에 오사카부 대표로 출전하여 5일 준결승 시합이 열렸다.

아깝게도 패하여 결승진출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당당 3위를 했다.

전국 우승경험이 있는 상대팀을 이기고 오사카부 대표로 출전한 오사카 조선고교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전국3위를 차지했다.

전국 수준보다 실력이 월등한 오사카 격전구 대표로 출전한 조선고교의 활약은 경이로운 성적이었다.

일반 일간지는 스포츠면만이 아니고 사회면과 지방면까지 조선고교의 뒷 기사까지 게재했다.

총련계 동포만이 아니고 재일동포 모두에게 강추위를 녹이는 훈훈한 쾌거였다.

북한의 핵과 일본인 납치문제로 총련게 동포와 학교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고 노골적으로 표면화 될 때도 있다.

인권문제로 이러한 부조리는 없애야 한다고 여기저기 목소리를 높이지만 미운오리새끼와 같은 처지이다.

이 아이러니의 벽을 십대의 어린 선수들이 정면으로 돌파했다.

백년을 맞이한 동포사회에서는 이렇게 밝은 스타트였으나 한국의 조선일보 인터넷 기사에는 우울했다.

1월 8일 김양 국가보훈처장은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한국에 안치되기 전까지는 일본 천황의 한국방문을 반대한다고 표명했다.

1910년 3월 26일 중국의 여순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찾지 못하는 실정이며 효창공원에는 가묘가 있을 뿐이다.

순국 백년을 맞이하여 일본정부가 정식으로 유해의 한국 안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천황의 한국 방문은 그후에야 가능하다고 강력히 주장한 내용이었다.

중국정부와 몇차례 협의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고 있지만 어렵다고 한다.

천황 방문과 아직도 어려움을 겪는 유해발견과 곁들여 일괄적인 해결을 바란다면 언제 실현될지 모를 일이다.

한국 정통성의 자리매김을 하는 산실인 보훈처장의 발언이고, 또 그가 백범 김구 선생의 자손이고 보면 그 발언의 무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의 흐름을 생각할 때 보훈처장의 발언에는 이해를 하고도 남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필자는 반대한다.

어려운 일들은 하나씩 풀어 나감으로써 전부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성을 갖고 있다고 어려운 것을 동시에 해결할려면 더 어렵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일합방 백년이라는 시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천황의 한국 방문은 한일양국의 갖고 있는 역사 인식의 갈등을 다른 차원에서 좁힐 수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아니 필자만이 아니다 아직도 차별을 받으면서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은 이 민감한 사항에 가장 바른 시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천황의 한국방문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이다.<제주투데이>


▶1949년12월 제주시 삼양출신,  1973년 병역마치고 도일, 1979년「현대문학」11월호 단편「오염지대」초회추천, 1980년<오사카 문학학교>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문학정신」8월호 단편「영가로 추천 완료,  중편「이쿠노 아리랑」으로 2005년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발간, 2007년 <이쿠노 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 문학상 수상, 1996년 일본 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소논문 1위 입상. 2003년 인터넷 신문「제주투데이」'김길호의일본이야기'컬럼 연재중, 한국문인협회,해외문인협회,제주문인협회 회원. 현재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면서 집필하고 있다.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