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구좌읍 용암해수산업단지 내 음료 제조회사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고교생 이민호 군. 이 군은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치료를 받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23일은 이민호 군의 열여덟 번째 생일이었다. 생일에 미역국도 먹지 못하고 서둘러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 군의 사연앞에 우리는 어떤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위로를 할 자격이 있기는 하는 걸까.

이번 이 군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현장실습 제도가 지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소한의 근로기준법조차 지키지 않은 어른들의 무책임이 빚어낸 비극이다. 이 군의 경우 현장실습 표준협약서에는 주 40시간을 일하도록 계약되어 있었다. 하지만 출퇴근 일지를 확인한 결과 하루 12시간씩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아직 성인이 아닌 고등학생을 성인근로자와 동일한 계약으로 일을 시키는 것도 문제인데, 여기다 12시간 씩 노동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업체의 책임이 클 수밖에 없다.

또한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현장실습장에는 감독 직원도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발생 후에도 해당 학교에 즉각적으로 알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사고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업체의 비양심도 문제지만 구조적 문제를 만들어낸 어른들의 무책임이 더 크다.

과거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기업 프렌들리를 강조하면서 현장실습과 관련하여 기업의 생산 서비스 스케줄에 맞춰 별도 근로계약을 체결하도록 용인해 주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면서 현장실습제도를 사실상 노예 계약으로 만든 일차적 책임은 정치권에 있다. 정치권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이 군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 군은 2-3차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이때 업체가 후속조치만 제대로 했다면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산업재해를 은폐한 업체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은폐가 일상화되도록 방치한 구조적 문제 더 크다.

그동안 현장실습제도가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은 여러 차례 있었다. 전공과 맞지 않는 업무에 배치되기도 하고, 현장실습생을 다른 직원들이 위험 때문에 기피하는 작업에 내몰기도 했다. 23일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됐다. 김영주 장관은 해당 업체에 작업 중지 명령을 내렸고 이번 사태에 대해 합동점검을 벌여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조치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이 군을 살릴 수는 없다. 졸지에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 참척의 아픔을 겪게 된 부모에게 이런 사후 조치들이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일 학습 병행이라는 이름으로, 조기취업이라는 이름으로 현장실습제도를 마치 저임금의 값싼 노동력으로 여겼던 어른들의 몰염치가 또 하나의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부끄럽다. 어른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와 만나게 만든 어른의 한 명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동안 현장실습제도는 학생, 나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을 사실상 현대판 노예 상태로 내몰았다.

취업률만이 전부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학교도, 업체도, 그리고 우리 사회도 아이들의 최소한의 인권에는 눈 감은 셈이 되어 버렸다. 김영주 장관은 국회에서 현장실습을 학교 학습준비로 전환하고 있다면서 교육목적의 현장실습을 1개월 내 직무체험으로 전환하려 한다고 답변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 '특성화고 정체성 찾기'라는 명목으로 시행된 현장실습제도에 대한 문제점이 이제서야, 우리 아이들이 죽어서야 마련되는 현실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취업률이 높은 특성화고에 재정지원을 하는 교육 정책, 그리고 기업 편의를 위해서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도 '몹쓸 규제'라고 규정했던 것이 지난 정권의 모습이었다.

지난 겨울 촛불의 광장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은 학생들이었다. “이게 나라냐”라는 그들의 외침은 단순히 최순실, 박근혜의 국정농단만을 겨냥한 발언이 아니었다. 경쟁만이 최선이라면서 아이들을 줄 세웠던, 어른들의 일그러진 욕망이 만들어낸 사회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외침이었고, 절규였다. 이제라도 어른들이 그들의 절규에 대답해야 한다. 그것이 이 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어른의 태도일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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