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사진=조수진 기자)

앞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관악산 기슭 공작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144만㎡(약 44만평)에 이르는 서울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엔 국가나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기여한 인물 18만1000여명이 안장돼 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현충원. 아이러니하게도 제주4·3 당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주도해온 인물과 국가폭력에 의한 무고한 피해를 막으려는 데 앞장선 인물이 함께 묻혀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현충원을 찾았다. 조사단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올해 4·3 전국화를 위해 유적지 기초조사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꾸려졌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연구소, 제주다크투어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사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사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조사단은 현충원에 세워진 묘비 중 제주4·3과 관련된 인물을 둘러보며 2021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주4·3의 위치를 가늠해봤다. 이날 현충원 내 4·3길, 5월길, 평화통일의 길 등 테마 답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연구(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에 참여하고 있는 박범철 경문고등학교 교사가 해설을 진행했다. 

#대규모 주민 학살 도운 채명신 장군(2묘역)

현충원 정문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2번 장병 묘역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병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다. 쭉 늘어선 묘비 가장 앞줄엔 주월한국군사령부 초대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 묘비가 마치 죽어서도 사병들의 사열을 받듯 홀로 서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채명신 장군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채명신 장군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채 장군은 1948년 4월 제주에 있는 9연대 소대장(당시 소위)으로 발령받은 뒤 같은 해 8월 수원에 있는 11연대로 옮겼다. 44일간은 김익렬 연대장과 이후엔 “제주도민 30만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고 밝히며 민간인 무차별 학살을 지시했던 박진경 연대장의 지휘 아래 근무했다. 

채 장군은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매일경제신문사, 1994)을 통해 제주4·3의 원인을 “남로당이 남한 단독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폭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3·1발포사건은 해방 직후 한반도 이남을 다스렸던 미군의 실정(失政) 때문에 들끓던 민심을 폭발하게 한 사건이었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 농산물 수탈 정책을 부활시켜 도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또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했고 친일 경찰을 그대로 채용해 민심은 분노로 바뀌어갔다. 게다가 한반도를 둘로 나뉘어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려하자 이에 맞서는 이들이 늘어갔다. 

박진경 대령에 대해 채명신은 “인도적이면서 전략적 차원의 행동”이라는 등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승만 정부의 4·3 무장대 토벌 작전에 동원돼 민간인 학살까지 서슴지 않고 자행했던 극우단체 ‘서북청년회’에 대해서도 “용맹스럽다”며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 불필요한 충돌로 인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장대 대장인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던 김익렬 중령에 대해선 채명신은 “색깔이 불분명하고 미온적인 인물”이라는 등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무모한 토벌을 막고 동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박진경 대령의 암살을 지시한 문상길 중위에 대해선 “좌익 사상에 물들어 김달삼 지령에 따라 연대장을 암살했다”고 매도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정치적 위기 타개 위해 제주를 붉은 섬으로 내몰다’ 이승만(대통령 묘역)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한 사실이 탄로나자 전 국민의 공분을 사고 마지못해 사임했던 이승만. 화강암 계단, 호랑이 석상, 석등 등 화려하게 꾸며진 그의 묘소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협했던 그의 전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7년 7개월간 이어진 제주4·3 시기 중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된 때인 ‘주민 집단희생기’는 1948년 10월11일부터 1949년 3월1일까지다. 대규모 강경진압 작전이 전개된 시기다.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며 말 그대로 ‘초토화’됐고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다. 초토화 작전에 대한 책임은 당시 남한 정부의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에게 제주의 상황은 정치적 위기를 ‘반공’이라는 이슈로 타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남한 정부는 유엔으로부터 국가 승인을 받기 전이라서 국제적으로 지위가 불안했다. 게다가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총회에 ‘전(全)한국 총선’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남한 정부 수립 이후에도 통일운동을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었다. 

또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국회 통과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 세력인 친일파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아울러 주한미군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이승만의 입지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했다.  

때마침 여수·순천 지역에서 군부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는 ‘여순 10·19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과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된다. 정치권은 ‘통일정국’과 ‘친일파청산 정국’에서 ‘반공정국’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미국과 남한 정부는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작전을 펼친다. 제주도경비사령부는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이상 지역에 통행을 금지하고 해안 이외의 지역에 출입하는 자를 모두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 다음 날인 18일부터 해안을 전면 봉쇄했다. 

불타는 오라리마을. 미군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1948. 5. 1)  <기록영화「제주도의 메이데이」에서> 4.3진상조사보고서
불타는 오라리마을. 미군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제주도의 메이데이>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1948. 5. 1). (사진=4·3진상조사보고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 마을과 산지를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1949년 11월24일 제정) 선포한 것으로 불법 계엄령에 해당한다. 미군 비밀문서에도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된 바 없으며 비상사태가 계엄령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은 1949년 1월 국무회의에서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며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발언하는 등 공식 석상에서도 제주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경하게 탄압하겠다고 밝혔다. 이 시기엔 민간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를 군경에 편입시켜 대량 주민학살을 초래하기도 했다.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는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고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사살되며 비극은 끝이 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에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군경은 또다시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검거한 이들에 대해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제주4·3 당시 최소 3만명이 국가폭력에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 됐으며 불법재판으로 2500여명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이승만 묘역의 시비나 안내문에선 군통수권자였던 그에게 수만명의 희생에 대해 책임을 묻는 문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익렬 장군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익렬 장군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동족끼리 총부리 겨누지 않겠다” 김익렬(1장군묘역·묘비165)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대규모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딘 미군정장관은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앞서 무장대 지도자와 교섭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당시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은 즉시 무장대에게 평화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만들어 비행기를 통해 살포했다. 

이후 4월28일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은 대정면 구억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들은 △72시간 내 전투를 완전히 중지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등의 내용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협상 사흘 만인 5월1일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는 ‘오라리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5월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협상은 깨졌다. 김익렬 연대장은 끝까지 초토화 작전에 반대하다가 5월6일 해임됐다. 그 자리에 박진경 중령이 들어오며 강경진압 작전이 본격적으로 감행됐다.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4·3과 관련된 군 지휘관 중 유일하게 4·3의 진상을 밝히는 ‘4·3의 진실’이라는 유고록을 남겼다. 그는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집필 사유를 밝혔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익렬 장군의 묘소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익렬 장군의 묘소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

#“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 박진경(54묘역·묘비2140)

1948년 5월10일 총선거를 앞두고 5월6일 9연대 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됐다. 미군정이 앞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진행하는 등 화평정책을 추진했던 김익렬 중령을 해임한 것은 앞으로 제주 상황을 강경하게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드러낸 인사였다. 

김익렬 중령의 증언에 따르면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했다. 이는 다수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박 중령은 부하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한 달 열흘가량 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한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박진경 대령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박진경 대령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당시 진행된 작전에 대해 한 언론은 “경비대와 경찰에 체포된 자는 약 6000명에 이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제주도 중산간 마을 전역을 수색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주민들을 체포한 이 작전은 ‘제주도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이었다. 이때 검거된 사람들 대부분은 주민들이었다. 

제주 사태를 취재했던 종군기자 조덕송이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 중엔 12~13세 되는 소년, 60이 넘은 늙은이, 부녀자까지 어느 모로 보아야 폭도라고 부를 수 있을지”라고 표현할 정도로 당시 경비대는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을 무조건 연행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수천 명의 포로를 잡아오자 딘 군정장관은 박 중령의 작전을 “성공적”이라 평가하며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하지만 박 대령은 승진 축하연이 열렸던 6월17일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다음날 18일 새벽 암살 당했다. 무차별 체포작전에 불만을 품은 부하의 총탄에 맞은 것.   

한 장의 투서로 암살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된 군인은 문상길 중위를 비롯한 모두 9명이었다. 관련 재판은 박 대령 암살 동기와 배후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은 “해방된 이 땅에서 본의 아닌 민족상잔에 쓰러진 동포의 죽음을 본 젊은이들이 어떻게 하면 30만 도민을 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이런 범행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는 오늘날 이 혼란에 빠지고 있는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다. 살려두면 이들은 반드시 민족을 위하여 싸울 것을 믿는다”고 주장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박진경 대령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박진경 대령의 묘비 뒷면에 사망 장소와 일자가 없다. (사진=조수진 기자)

하지만 검찰관은 피고인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4명에게 총살형, 1명에게 무기징역, 1명에게 5년 징역, 나머지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한국 사회 각계각층에서 총살형에 반대하고 감형을 요구하는 성명이 발표됐다. 

이 때문인지 총살형을 언도 받은 2명은 집행 직전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하지만 작전을 지휘한 문상길 중위와 직접 총을 쏜 손선호 하사에겐 총살형이 집행됐다. 문상길 중위는 유언으로 “미국의 지휘하에 조선민족을 학살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며 간다”고, 손선호 하사는 “민족을 위하여 싸우는 국방군이 되게 하여 주십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 

앞서 말했듯 현충원엔 나라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이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미군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우리나라 민족이기도 한 제주도민 모두를 희생시켜도 좋다고 선언한 이의 묘가 여기에 있는 것이 현충원의 조성 취지와 부합하는 일일까. 

박진경의 묘비는 전사(또는 순직)한 장소와 날짜가 적힌 다른 묘비와 달리 뒷면이 비어있다. 한 조사단원은 “부하로부터 암살당한 사실을 새겨넣는 건 불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묘비 앞 창군 동우회가 새긴 것으로 보이는 표석에는 박진경의 죽음을 “작전을 벌이던 중 젊은 나이로 산화”했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휘호 여사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휘호 여사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50년 만에 진상조사 길 열다” 김대중(대통령 묘소)

다른 대통령의 묘소와 비교하면 김대중 대통령의 묘소는 소박했다. 계단이나 병풍석, 석상이 없어 위압감이 들지 않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였던 1987년부터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다(1987년 11월30일 대통령선거 제주 유세 중)”, “진상규명은 제주도민의 마음의 응어리를 씻어줘 민족단결과 화해의 계기로 삼기 위함으로 과거 역사에 매몰되는 잘못을 막기 위해서도 반드시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1997년 10월31일 제주·호남 대통령선거 TV토론 중)”며 제주4·3을 꾸준히 언급해왔다.

김 전 대통령은 14대 대통령선거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열렸던 국민의 정부에서 드디어 제주4·3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00년 1월 제주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50년 동안 침묵해왔던 제주4·3의 비극적인 역사를 세상에 알리고 진상조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국가폭력에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온 희생자와 유족들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첫걸음을 뗐다. 이 같은 노력은 다음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졌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제주4·3 과정에서 일어난 국가폭력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4·3특별법은 인권이 그 어느 가치보다 우선되는 사회, 도도히 흐르는 민주화의 도정에 금자탑이 될 것입니다.”

지난 2000년 1월11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제주4·3 특별법 제정 서명식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같이 말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이 발언을 언급하며 “제주4·3사건 진상규명의 역사는 한국 정치 민주화의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하며 조금씩 진전돼 온 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채병덕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채병덕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채병덕(1장군묘역·묘비12)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

지난해 제주4·3평화재단이 미국자료현지조사팀을 구성해 6개월 동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중심으로 4·3자료를 조사했다. 그중엔 제주도에서 벌인 ‘초토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1949년 1월28일 “공산주의자를 싹쓸이할 계획”을 밝히는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이라고 극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기 직전인 1948년 10월 제주도 9연대를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정호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정호의 묘소. (사진=조수진 기자)

#김정호(1장군묘역·묘비39)

1948년 4월3일 무장대의 무장봉기가 일어난 직후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이 제주에 파견돼 제주비상경비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무장대 구성원에 대해 처음부터 ‘외부 유입설’을 주장했다. 

김정호는 “폭동사건은 제주도민의 주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육지부에서 침입한 악질불량 도배들이 협박 위협 등으로 도민을 선동시켜 야기된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며칠 후엔 “반도를 체포하여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계열에서는 일부러 잔악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해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하여다 제일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 등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형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외부 유입설은 북한군 유입설로까지 확대됐다. 이 같은 설은 곧 허위로 밝혀졌지만 당시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강경 진압작전의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문용채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문용채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문용채(1장군묘역·묘비72)

문용채는 만주국군(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육군) 헌병 소위로 임관했다가 일제강점기 말 헌병 상위로 진급해 평천헌병대 대대장까지 지낸 친일파다. 해방 이후 제주감찰청 수사과장을 거쳐 1947년 9월 제1구경찰서장이 됐다.

문용채는 경찰서장 취임 포부를 밝히는 자리에서 “도민 여러분은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여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며 “제주도의 경찰관들의 애국심에 불타는 정열과 책임감 그리고 날로 증진되어 가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최석용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최석용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최석용(1장군묘역·묘비60)

최석용은 1949년 2연대 소속 서청대대장을 맡았다. 군 수뇌부는 함병선 2연대장에게 강경작전의 임무를 부여하면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2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 첫 번째 조치가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군경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부장관과 합의해 서북청년회 단원들을 남한 전역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과정을 거쳐 2연대의 3개 대대 중 제3대대는 대부분 서청 단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담당해 제주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작용했다. 

지난 2017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는 제주4·3 당시 무차별적인 제주도민 학살을 자행한 책임을 들어 집중검토 대상자 1차 명단에 최석용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명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지난 12일 오전 제주4·3 도외 유적지 조사단이 서울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김명의 묘. (사진=조수진 기자)

#김명(33묘역·묘비1395)

“자기가 ‘산 사람’이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 좀 협조해라’ 그러고 다니다가 그 마을에서 쌀 한 톨이라도 나오면 마을 남자들을 집단 학살하고 그랬다.”

김명은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으로 ‘산 사람(무장대)’로 위장해서 활동했던 특수부대 부대장이었다. 1949년 2월부터 8월까지 집중적으로 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여순10·19사건 진압작전에도 참여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연대는 은파산 전투에 투입됐다가 거의 궤멸됐다. 

2연대는 1949년 2월 봉개리를 초토화시켰다가 이 마을을 재건하면서 2연대 연대장 이름 ‘함병선’에서 ‘함’을, 부대장 이름 ‘김명’에서 ‘명’을 따서 마을 이름을 ‘함명리’라고 지었다. 이 마을은 5년간 함명리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다시 ‘봉개리’로 이름을 바꿨다. 

무장대로 가장한 2연대 특공대. (사진=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무장대로 가장한 2연대 특공대. (사진=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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