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당시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다른 지역으로 끌려가 옥살이를 한 수형인 수는 2530명이다. 어떤 이는 타지에서 옥살이를 하던 중 목숨을 잃고 어떤 이는 지금까지 생사여부조차 알려지지도 못했고 어떤 이는 고문과 감옥에서의 기억을 평생 고통으로 간직한 채 마지못해 살기도 했다. 

지난 9월13일부터 15일까지 사흘간 제주도외 유적지 조사단 동부팀(팀장 오화선)은 경상도와 부산 일대 70여년전 제주도민들이 끌려가거나 희생 당한 곳을 찾았다. 조사단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가 올해 4·3전국화를 위해 유적지 기초조사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꾸려졌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연구소, ㈔제주다크투어 등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마산형무소 터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에 부영주차장이 있는 곳이 예전에 마산형무소가 있던 터다. 마산형무소는 지난 1910년 부산본감의 분감(원래의 감옥에서 나눠서 따로 세운 감옥)으로 세워졌다가 1913년 이 자리로 옮겨 1970년까지 있었다. 4·3 희생자 중 마산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이가 6명, 옥사한 이가 45명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부영주차장. 마산형무소가 있던 터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부영주차장. 마산형무소가 있던 터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부영주차장. 마산형무소가 있던 터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 부영주차장. 마산형무소가 있던 터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진주형무소 터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상봉한주타운 일대는 예전에 진주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진주형무소는 1908년 생겼으며 부산본감의 분감이었다가 1915년 이 자리로 옮긴 뒤 1946년 진주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됐다. 4·3 희생자 중 마산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이는 2명으로 확인됐다.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상봉한주타운 일대는 예전 진주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상봉한주타운 일대는 예전 진주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부산형무소 터

부산시 구덕로 동대신동 2가에 있는 삼익아파트 일대는 예전에 부산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지난 1906년 부산감옥이 생겨났으며 1923년 부산형무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후 1961년 부산교도소로 다시 바뀌었다가 1973년 사상구 주례동으로 옮겼다. 4·3 희생자 중 부산형무소에서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희생자는 58명, 옥사한 희생자는 40명으로 알려진다.

부산시 서구 동대신로2가에 있는 삼익아파트 일대는 예전 부산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부산시 서구 동대신로2가에 있는 삼익아파트 일대는 예전 부산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산코발트광산

일제 강점기 일본 광업인이 금과 은을 채굴하던 광산이었다가 이후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자 1943년부턴 채광과 선광, 제련시설까지 갖춰 광물을 수탈해갔다. 일제가 전쟁에서 패망한 뒤 버리고 간 코발트광산은 5년여간 폐허로 방치되기도 했다. 지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해 7월초부터 9월 초까지 약 2개월에 걸쳐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지난 1960년 5월 경산군피학살자실태조사회가 꾸려지고 합동위령제까지 치렀으나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진실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좌절됐다. 이후 지난 2000년 3월 경산유족회가 다시 꾸려지면서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운동을 펼친 끝에 지난 2005년 5월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통과됐다.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터널 안에는 지금도 많은 유해들이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이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국가 차원의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10년 동안 발굴된 유해는 500여 구에 이른다. 마침내 2009년 11월17일 군경에 의한 불법적인 학살이라는 진실규명 결정서가 발표됐다. 경산시는 위령사업과 역사 평화공원 조성 등을 권고하는 진실규명 결정문에 따라서 지난 2013년부터 현장을 보존하고 진입로를 개설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희생자는 198명인데 이중 일부가 경산코발트학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한국전쟁 이후 대구·부산형무소 수감자와 국민보도연맹원 약 3500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된 경산코발트광산.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가창골&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한국전쟁 발발 후 연행된 보도연맹원들은 대구 가창골과 경산코발트광산 등에서 사살됐다. 이들은 형무소에 상주하던 대구(경북)지구 CIC(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대), 헌병대, 지역 경찰 등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적으로 살해됐다. 가창골짜기는 가창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됐고 지난해 10월 가창댐 아래 쪽에 ‘대구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위령탑’과 위령공원이 만들어졌다. 

대구 가창댐.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가창댐. (사진=조수진 기자)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을 점령했던 미군정의 통치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들이 들고 일어선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된 이 저항운동은 같은 달초까지 경북지역으로 퍼졌다. 이에 미군정은 충청도와 전라도, 강원도 등 주변지역으로부터 경찰력을 증원하고 우익청년단까지 동원해 항쟁을 조기에 진압했다. 이 때부터 한국전쟁 시기까지 많은 민간인들이 군경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희생됐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1960년 4월19일 직후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 학살 관련자를 엄중히 처단하고 학살사건의 진상규명, 경찰의 유족 감시 해제 등을 요구했다. 그 결과 같은 해 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해 피학살자 신고를 받고 현장조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유족회 간부들이 반국가단체 결성 및 활동 혐의로 구속돼 최고 사형 등의 판결을 받으면서 유족회는 해체됐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유족들이 또다시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립, 일부 규명이 진행되고 있다.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 10월항쟁 및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가창댐 아래 세워져 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6연대 주둔지 터

대구시 남구 이천동에 있는 미국19원정지원사령부(캠프 헨리) 자리는 1946년 2월부터 1948년까지 국방경비대 6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한국전쟁 기간 미8군사령부가 주둔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 지금의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다. 

대구시 남구 이천동 미국19원정지원사령부(캠프 헨리) 자리는 1946년2월부터 1948년까지 국방경비대 6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남구 이천동 미국19원정지원사령부(캠프 헨리) 자리는 1946년2월부터 1948년까지 국방경비대 6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형무소 터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 삼덕교회가 있는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지난 1908년 경상감영 내 설치된 대구감옥이 1910년 이곳으로 옮겼다. 1923년 대구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고 1971년 달성군 화원읍으로 옮겨갔다. 한국전쟁 직전 대구형무소에는 제주4·3과 관련해 수감된 사람도 다수 있었다.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에 있는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형무소 벽 일부를 남겨 설치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에 있는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형무소 벽 일부를 남겨 설치했다.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에 있는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1950년 대구형무소 전경. (사진=조수진 기자)
대구시 중구 삼덕동2가에 있는 삼덕교회 일대는 대구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1950년 대구형무소 전경. (사진=조수진 기자)

#김천 돌고개와 대뱅이재 골짜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1950년 7월경 김천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김천형무소 재소자 등 수백명이 CIC와 헌병대에 의해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대뱅이재 골짜기와 돌고개 골짜기에서 불법적으로 집단 학살됐다. 제주4·3 당시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행방불명된 희생자는 25명이다.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돌고개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목.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돌고개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목.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일대 대뱅이재와 돌고개 골짜기는 한국전쟁 이후 군경에 의해 국민보도연맹과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일대 대뱅이재와 돌고개 골짜기는 한국전쟁 이후 군경에 의해 국민보도연맹과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일대 대뱅이재와 돌고개 골짜기는 한국전쟁 이후 군경에 의해 국민보도연맹과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산 일대 대뱅이재와 돌고개 골짜기는 한국전쟁 이후 군경에 의해 국민보도연맹과 김천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사진=조수진 기자)

#김천형무소 터

경상북도 김천시 평화동에 있는 한일로얄맨션 일대는 김천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김천형무소는 지난 1921년 대구감옥 김천분감으로 문을 열어 1924년 김천소년형무소가 됐다. 제주4·3 당시 김천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옥사한 희생자는 5명, 행방불명된 희생자는 25명이다. 

경북 김천시 평화동에 있는 한일로얄맨숀 일대는 김천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김천시 평화동에 있는 한일로얄맨숀 일대는 김천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문상길 중위 생가

4·3 당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선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며 한 달 열흘가량 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박진경. 수천명의 포로를 잡아오자 딘 미군정장관은 박진경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승진 축하연이 열렸던 1948년 6월17일 박 대령은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다음날 18일 새벽 암살당했다. 

무차별 체포작전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부하의 총탄에 맞은 것이다. 이를 지휘한 이가 문상길 중위다. 이 때문에 문 중위와 직접 총을 쏜 손선호 하사는 사형을 언도 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문 중위는 “미국의 지휘하에 조선민족을 학살하는 조선군대가 되지 말기를 바라면 간다”고 유언을 남겼다.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문 중위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로 생가는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까치구멍집(공기가 통하도록 낸 둥근 구멍이 까치둥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형태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 경북 민속문화재 69호로 지정됐다. 

문 중위의 생가는 안상학 시인의 ‘기와 까치구멍집’이라는 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내가 한 일은 다만/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시인 개인이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낸 문 중위의 내력과 가족을 밝히고 있다. 이 작품이 수록된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올해 5·18문학상을 수상했다.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안동시 남후면 검암리에 있는 기와 까치구멍집은 문상길 중위 생가이다. 원래 이 건물은 임동면 마령리 이식골에 있었으나 임하댐을 건설하면서 옮겨졌다. (사진=조수진 기자)

#안동형무소 터

경북 안동시 신세동 동흥한의원 뒤편 일대는 안동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안동형무소는 지난 1921년 7월 대구감옥 안동분감으로 시작했으며 1945년 승격했다. 1961년 안동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85년 12월 안동시 풍산읍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같은 모양의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경북 안동시 신세동 뒷편 일대는 안동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경북 안동시 신세동 뒷편 일대는 안동형무소가 있던 자리다. (사진=조수진 기자)

 

저작권자 © 제주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