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순서
① 여성 폭력 그리고 안전
② 일터와 돌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정책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그러나 현 대선정국에서는 소위 ‘이대남’으로 대변되는 남성 유권자들의 표가 가장 중요한 결정권으로 여겨지고, 모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등 여성과 관련된 문제는 주변화되거나 적극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 지역 성평등을 위해 활동해온 <제주여성인권연대>와 <제주여민회>는 2차에 걸쳐 대선 정국에서 드러나는 혐오와 차별의 정치에 문제제기하고,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한 비전과 정책 수립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번 기획을 통하여 제주지역 주권자들이 성평등에 투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요즘 세상에 구조적 차별은 없다,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는 말이 2022년 대선 공식 국면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참담하다. 차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대선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건 심각한 역사적 퇴행이다. 어떤 차별이든 차별은 겪어본 자만이 그 고통을 안다. 그 경험은 말하기조차 쉽지 않는 ‘구조’임을 수십 년간 겪어온 우리 제주 도민들은 처절하게 알지 않는가.

2018년, 한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미투를 통해 여성들은 구조적 불평등과 성차별의 현실을 체감했다. 2022년, 지금도 여전히 여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있으며, 피해의 억울함과 두려움으로 평생을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피해여성들을 향한 혐오와 비난, 2차 가해, 심지어 무혐의 판결을 목도하고 있는 현실은 세상을 향한 용기마저 꺾이게 만든다. 하루가 멀다고 보도되는 수많은 데이트 폭력과 살해, N번방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디지털 성범죄는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전혀 안전하지 않다. 성폭력의 뿌리는 명백히 성차별이다. 그리고 성차별은 사회 곳곳에 먼지처럼 스며있다.

UN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17년 일반권고 35에서 여전히 “여성에 대한 성에 근거한 폭력은 높은 불처벌률과 함께 모든 국가에 만연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성차별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구조적 문제라는 점은 오래된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성차별은 여전히 공고한 가부장제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사회문제다.

여성가족부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폭력 분야에서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등 여성폭력사건의 검거 건수는 큰 폭으로 늘어났다. 2019년 가정폭력사건 검거 건수는 5만 277건으로 2011년(6,848건)과 비교해 7.3배 수준이다. 같은 해 데이트폭력·스토킹 검거 건수는 각각 9,858건·581건으로 2013년보다 36.2%, 86.2% 증가했다. 2020년 불법촬영 발생 건수는 5,032건으로 2011년(1,535건)에 비해 3.2배 늘었다. 검거 인원 5,151명 가운데 남성이 94.1%였다. 2019년 성폭력 사건 발생 건수는 3만 1400건으로 2010년(2만 375건)보다 1.5배 증가했다. 강력 범죄 피해자 10명 중 9명이 여성이니, 여성들은 언제든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실이 이럴진대 구조적 차별은 없고 개인적 차별만이 존재한다는 말은 결국 피해자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근원적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제주 또한 결코 안전하지 않다. 2021년, 행정안전부에서 공표한 지역안전지수에서 제주는 범죄, 생활‧안전, 화제 3개 분야에서 가장 낮은 5등급, 자살 4등급, 교통사고와 감염병 분야에서 3등급으로 전국 최하의 수준으로 나타났다. 또한 제주도는 3년 연속(2015년~2017년) 인구 1만 명당 5대 범죄발생 건수 1위를 기록하였다. 5대 강력범죄는 살인·강도·절도·폭력·성폭력 등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표 범죄이다.

(그래픽=픽사베이)
(그래픽=픽사베이)

이처럼 불안전한 사회구조에서 여성들은 생존과 여성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하지만 위대한 외침과 죽음, 그리고 실천을 이어왔다. 그러나 최근 여성폭력 관련 실태나 대선 정책들을 마주하며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여성폭력에 대한 몰이해와 무지에서 나온 ‘성폭력 무고죄 처벌 강화’ 입장은 피해자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재갈을 물리는 것과 같다. 또한 ‘18세 미만 아동청소년의 녹화진술이 가해자의 방어권을 제한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그간 성폭력 방지를 위해 쟁취한 결과물을 무너뜨리는 판결로 피해자의 생존권과 행복권보다 가해자의 방어권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성매매로 명기되는 구조적 성착취 문제는 또 어떤가. 성매매방지법 시행 17년이 지난 지금, 성매매의 본질을 ‘경제적 대가를 매개로 약자인 성매매여성의 신체와 인격을 지배하는 폭력적이며 착취적 성격이 존재’한다고 2016년 헌법재판소에서 밝혔음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처벌되고 있다. 성매매 범죄의 주범은 성매매여성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성매매 알선조직임에도 성매매 구조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 성매매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 위기 상황은 구조적 불평등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정폭력으로부터 피신한 여성들은 세대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난지원금에서도 배제가 되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한 행정 편의적 정책은 여성인권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있다. 이렇듯 여성의 현실을 무시한 채 혐오와 차별, 집단적 백래시까지 선동하는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에서 여성이 느끼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은 더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여성의 삶은 구조적으로 조금도 평등하지 않으며 안전하지도 않다.

성인지적 관점의 무지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성별갈등을 조장하고 성평등한 국가 실현의 책무를 망각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혐오정치를 불러내고 있다. 여성들은 일상에서, 직장에서, 거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길 결단코 원치 않는다. “한 사람의 여성이라도 안전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안전하지 않다.” 지금도 여전히 이 슬로건은 유효하다. 혐오정치를 끝장내고, 성평등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여성들의 힘 있는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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