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5월, 제주지사였던 원희룡 국토부장관은 마크 리퍼트 前 주한미국대사를 제주도로 초청했다. 친한파로 알려진 리퍼트 전 미국 대사. 그는 그때 제주에 와서 무엇을 했을까. ‘좋은 시간’을 보냈다. 둘은 제주푸드&와인 페스티벌에 함께 했다. 원 전 지사는 러퍼트 전 대사에게 해녀체험도 시켜줬다. 한 차례 언론에 내보낼 사진촬영용으로 말고는 딱히 쓸모없어 보이는 명예해녀자격증을 주고, 손이 가벼울까 걱정되었는지 옹기세트와 제주 자연 화보집도 선물했다. 

그리고, 제주4·3이라는 역사는 외면했다.

한심한 일이다. 리퍼트 전 대사의 제주 방문은 제주 도백과 미국 관계자가 제주4·3평화공원을 공식적으로 함께 방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제주4·3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원희룡 전 지사는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먹거리 페스티벌이 더 중요하다고 본 모양이다.

“향후 4·3 문제와 관련해선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오영훈 제주지사의 말이다. 오 지사는 취임 100일을 맞아 진행한 도민보고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도백으로서 할 말을 했다는 평가다. 제주도지사가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추념식에 참석한 적 없는 원희룡 전 지사보다 제주4·3에 대한 인식은 나아 보인다. 오 지사는 제주4·3 당시 미군정의 책임에 대해 처음 거론한 도지사가 됐다. 하지만 제주 행정의 수장으로서 미국의 책임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분명하게 취하겠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제주도지사가 주체가 돼 미국의 책임을 규명하는 작업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

오영훈 제주지사(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오영훈 제주지사(사진=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이날 오 지사는 “이 문제(미국의 책임 규명)가 해결되면 4·3의 정명도,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도 완결될 수 있는 구조로 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제주4·3은 아직 법적으로 4·3‘사건’으로 규정돼 있다. 상식적인 언론은 더이상 제주4·3을 ‘사건’이라고 축소해 부르지 않지만, 제주4·3을 다루는 역사 교과서들은 법률상 명칭을 따라 ‘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건’으로 축소돼 불리고 있는 이 역사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사태’에서 제 이름을 찾았듯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려면 공식적인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 4·3의 정명은 ‘4·3의 완전한 해결’이라고 말하는 단계로 일컬어진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백비(白碑)가 누워 있다. 일어설 날을 기다리고 있다. 4·3의 바른 이름이 새겨지는 날이다.

제주4·3의 정명 작업은 지난하다. 정부와 국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설득을 위해서는 진상규명의 공백을 매울 필요성이 제기된다. 백비를 일으켜 세우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당시 미군정의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 공식적으로 미군정의 책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는 것. 그렇게 되면 제주4·3 정명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오 지사는 또 “(미국의 책임 규명이) 민간 학계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고 미국 협조도 필요하다. 한미 동맹 강화를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수행할 주체가 어디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 정도 발언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주도가 앞장설 필요가 있다. 미국의 책임 규명을 위한 학문적 지원과 미국 정계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4·3에 대해 주한미국대사가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도 제공해야 한다. 주한 미국대사를 초청해 제주 4·3평화공원의 행방불명인 묘역을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백비가 아직 누워 있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4·3평화기념관의 백비(白碑)(사진=제주투데이 DB)
4·3평화기념관의 백비(白碑)(사진=제주투데이 DB)

제주4·3 관련 시민사회는 ‘4·3의 세계화’를 말하고 있다. 일제 이후 서구 열강들이 바라는 동아시아의 질서에 맞선 주체적인 제주도민들의 몸부림과 무자비한 탄압의 역사가 바로 제주4·3이기 때문이다.

오영훈 제주지사는 4·3의 세계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민사회의 노력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 먼저, 주한 미국대사를 초청해 제주4·3을 알릴 필요가 있다. 내년 제주4·3추념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정부에 적극 요청해야 한다. 이어 미국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담화 등 제주 행정 수장이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은 유족.(사진=김재훈 기자)
제주4·3평화공원 행방불명인 묘역을 찾은 유족.(사진=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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