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진성. (사진=제주투데이DB)
수산진성. (사진=제주투데이DB)

3성 9진은 조선시대 제주도의 방어체계를 이르는 말입니다. 3성은 제주성, 대정성, 정의성을 말하고, 9진은 제주의 주요 경계지역 9곳에 설치된 진성(鎭城)을 말합니다. 주요 임무가 해안경비였기에 9진은 대부분 해안과 인접한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9진 중 하나인 ‘수산진’은 해안에서 약 5km 떨어진 내륙, ‘수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해안방어와는 다른 수산진의 군사적 목적을 상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원(元)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세계제국이었습니다. 원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은 후 제주를 직할 통치하였습니다. 이때 원은 제주를 동서로 나누어 동아막, 서아막을 설치하였습니다. 말(馬)로 세계를 제패한 원제국이 경영했던 국마장(國馬場) 14곳 중 하나가 동아막, 서아막이었으니 그 규모나 기술 또한 세계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이 패망한 뒤, 세계적인 마장(馬場)은 제주 백성의 몫이었고, 제주인들은 제주마 관리에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제주 백성에 의한 말(馬)의 상거래와 무역이 성행하여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한 것은 고려 말기의 일이었습니다. 

고려를 뒤이어 제주를 지배한 조선의 최대 관심사는 제주우마(齊州牛馬)였습니다. 태조에게 바쳐진 제주우마 장적(帳籍)에는 말 4414필, 소 1914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조선 창건과 함께 제주우마 국유화 정책이 시행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국유화 정책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수산진은 동아막 주변에, 차귀진은 서아막 주변에 설치되었다는 것. 둘째, 수산진과 차귀진이 9진 중 가장 먼저 축성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할 때, 수산진의 군사적 목적이 조선의 우마정책과 무관치 않으리라는 추정은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조선의 우마정책은 왜 진성과 군대를 필요로 했을까요? 우마의 국유화는 고려 말기의 자율성을 누리며 형성된 말 시장과 그것을 통해 축적된 자산의 동결과 몰수 과정이었을 겁니다.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풀 한 포기조차 왕의 성은이었던 시대에 보상이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제주백성은 우마의 국유화를 순순히 받아들였을까요? 저항은 없었을까요? 왕명의 시행은 문이 아니라 검의 일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두 가지 사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전설입니다. 

먼저 세종실록에 제주의 우마적(牛馬賊)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마적은 우마를 도살하여 판 자를 말합니다. 세종실록 67권에는 우마적 650명을 압록강, 두만강 인근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는 기록과 우마적이 1000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진안할망당 전설입니다. 이 전설은 워낙 유명해서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요약하여 올려 봅니다. 

옛날 수산 마을에 군대가 주둔하였다. 군인들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다. 하지만 성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지나가던 중이 “여자아이를 묻으면 성이 완성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중의 말을 따라 사람들은 아이를 묻고 다시 성을 쌓았다. 중의 예언대로 성은 완성되었다.

성이 축성된 이후 마을 사람들은 밤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희생된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치성소를 만들어 죽은 아이를 위로하였다. 시간이 흘러 치성소는 성안으로 입성하게 되었고, 희생된 아이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할망신이 되었다. 

진안할망당 전설의 진원지는 수산진입니다. 수산진 축성은 우마적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난 세종 21년의 일입니다. 이러한 시기적, 장소적 연관성은 수산진과 우마적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전설과 역사를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사진=고승욱)
성산읍 수산리 수산초등학교 교정에 핀 백동백입니다. 수산초등학교는 수산진성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사진=고승욱)

우마적이 1000명이었던 당시 제주인구는 약 6만이었습니다. 이를 현 제주 인구 70만에 대입해 보면, 단일 사건으로 1만 명이 넘는 범죄자가 발생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마적 관련자나 그 식솔까지 합친 수를 현재 인구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불법과 무질서가 아니라 민간인 1000명이 범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던 제주사회의 특수성입니다. 

제주인구 6만명(6만3093명)은 조선건국 43년 후의 기록입니다. 43년간 큰 변동 사항이 없었다면 제주 인구는 이미 고려말에 6만에 근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이영권, 2013, 조선시대 해양유민의 사회사, 163p) 유의미한 인구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43년 만에 범죄자가 1000명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고려말부터 6만 명을 먹여 살리던 경제시스템에 발생한 이상징후입니다. 경제시스템 이상징후는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혹은 이에 준하는 사회변동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 당시 제주 사회의 유일한 사회변동은 제주우마 국유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마적 사건을 다음과 같이 뒤집어 읽어야 합니다. 우마적 사건은 43년 동안 누적된 제주우마 국유화의 결과이다. 우마적 사건은 제주경제를 붕괴시킨 조선이 그 피해자에게 도적이란 딱지를 붙인 사건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가족을 잃고, 고향에서 쫓겨난 제주 백성들은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제주백성의 저항은 얼마나 강했을까요? 조선의 탄압은 얼마나 심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글을 가진 조선은 우마적에게 선정을 베푼 세종에 대한 기록만 남겼을 뿐입니다. 

글을 갖지 못한 제주백성은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제주백성의 저항이 컸다면 무수히 많은 말을 남겼을 겁니다. 하지만 조선왕조 오백년은 민중의 말이 견디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고, 민중의 격정과 원한을 쓸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여기 진안할망당 전설 속에 제주백성의 외마디가 남아있습니다. 모질고 달콤한 오백년 세월을 견뎌내고 우리에게 도달한 단 하나의 문장은 ‘성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입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무엇 하나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없습니다. 다만 ‘성은 무너지기를 반복했다’는 실마리를 통해 조선의 제주우마 국유화 과정에서 발생했을 저항의 개연성을 상상해 볼 따름입니다. 하지만 저의 관심은 단서를 부풀려 소설을 쓰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진안할망당 전설과 4·3의 유사성입니다. 무리하지만 전설과 4·3을 연결해 보겠습니다.

성 무너짐-4·3 저항 

아이의 희생-3만 희생자 발생

아이의 울음소리-4·3 희생자의 원한

위로와 치성-4·3진상규명 운동 

진안으로 입성-4·3특별법 제정, 4·3평화공원 설립

‘성’을 ‘국가’로 바꿔 읽으면 무리한 시도는 나름의 연관성을 보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전설과 4·3 모두 동일한 질문을 빼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은 왜 무너졌는가? 누가 왜 조선에 저항했는가? 4·3은 왜 일어났는가? 누가 왜 미군정과 대한민국에 저항했는가? 

아닙니다. 전설과 달리 4·3은 저항의 원인을 물었습니다. 나아가 이승만과 미군정의 책임을 규명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룬 이 성취를 일컬어 ‘저항담론’이라 합니다. 

누가, 왜 저항했는가.

 

하지만 시급한 4·3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사회적 의제를 빨갱이로 낙인찍는 분단모순을 우회하기 위해서 요청된 것은 ‘희생자담론’이었습니다. ‘희생자담론’은 합동위령제 봉행에서 4·3특별법 제정까지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4·3의 저변을 확대하였고, 4·3의 전국화를 이끌었습니다. 4·3유가족 보상 문제까지 해결해낸 ‘희생자담론’은 이제 우리에게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자 합니다.

올해도 4·3평화공원에서 4·3위령제가 열릴 겁니다. ‘화해와 상생’의 장에서 우리는 또 다시 눈물을 흘릴 겁니다. 하지만 가해자의 사죄 없는 용서의 장에서 우리의 눈물은 ‘저항담론’과 함께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분단모순을 피하기 위해 선택했던 상황 논리가 역사라는 필연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가 되지 못한 채 우리 앞에 도래한 전설이 묻고 있습니다. 슬픈 전설로 남을 것인가? 혹독한 역사의 길을 갈 것인가? 이름을 얻지 못한 4·3 백비가 두 질문 한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

 

4·3 평화공원 안에 4·3백비가 누워있습니다. (사진=고승욱)
4·3 평화공원 안에 4·3백비가 누워있습니다. (사진=고승욱)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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