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5월은 아름답습니다. 온갖 꽃들이 아름답고, 새순과 묵은순이 어우러진 나무의 녹색 향연이 아름답습니다. 제주의 5월은 분주합니다. 아름다운 제주를 즐기러 방문하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으로 분주합니다. 관광객들이 싱그러운 표정으로 제주의 5월을 향해 첫발을 떼는 곳, 제주공항입니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겐 낯선 제주민중의 역사가 제주공항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재수의 난으로 대표되는 제주민중 저항의 역사가 새겨진 ‘진터왓’, 일만팔천 신을 영접하던 ‘오리정’, 일제의 정드르비행장 건설 이후 세 번의 철거로 지도에서 사라진 마을, ‘몰래물’.

아직도 활주로 밑에 4.3희생자가 묻혀있는 제주공항은 저항의 진지이자, 신과 인간의 경계이자, 철거민의 고향입니다. 제주민중의 희망과 절망이 어리고 서린 곳, 제주공항은 제주민중사 100년의 출발점입니다.

1. 진터왓

조선시대 제주의 국마장(國馬場)은 한라산을 제외한 제주 전체 면적의 3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넓은 국마장 내에 목장전(牧場田)과 화전(火田) 개간이 허용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말의 효용이 떨어지게 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조선은 유휴지가 된 국마장 활용 방안으로 제주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목장전과 화전을 허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선후기 제주도 국마장 범위와 분포(강만익,2016)
조선후기 제주도 국마장 범위와 분포(강만익,2016)

이러한 점진적 변동은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공마제도 폐지에 이르게 되지만, 제주 백성의 부담은 오히려 더 늘어나게 됩니다. 목장세, 화전세에 더해 공마대전(貢馬代錢)이라 하여 말 대신 금납을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이중과세와 각종 세금의 폐단으로 민심은 동요하게 되었고, 이에 더해 국마장 개방으로 유입된 유민과 제주인의 갈등이 겹치면서 동요한 민심은 연이은 민란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1862년 강제검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 1901년 이재수의 난, 40년 사이에 세 차례의 민란이 발생합니다. 이 중 마지막 민란이었던 이재수의 난은 대한제국 선포와 맞물려 조선의 복잡한 국내외 정세와 극에 달한 사회모순을 노정합니다.

대한제국은 황실 중심의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러, 일 등 주변 강대국에게 나라 곳간을 다 내어준 대한제국은 개혁제정 충당을 위해 백성의 등골적출에 나서게 됩니다. 제정확보를 위해 파견된 봉세관과 러,일을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프랑스 천주교 세력이 결탁하면서 절대권력을 형성하였고, 이러한 절대권력에 유민들이 추종세력으로 결합하면서 제주사회는 세폐, 교폐에 더해 유민들이 일으킨 온갖 사회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에 분노한 제주민중의 저항이 신축년(1901년)이재수의 난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조선은 사회적 모순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제국이라는 분칠을 하였지만, 내실 없는 형식적 개혁은 오히려 민중과 민중의 갈등을 부추김으로써 전체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말았습니다.

물 막은 섬에 사는 이들에게는 지방관의 학정을 중앙에 알릴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주민중에게 민란은 지방관의 폐단을 알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민란이 일어나면 조정에서는 안무사를 파견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민란을 수습합니다. 대신 민란을 이끈 장두는 자신의 목을 내놓음으로써 반역죄에 대한 벌을 갈음하는 것이 제주민란의 전통이었습니다. 신축년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이 이끈 민군은 관덕정을 장악함으로써 제주목사, 봉세관, 프랑스 신부의 폐단을 대한제국 황실에 알리고, 삼인의 장두는 대한제국이 세운 근대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이재수의 난 당시 민군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어 제주성을 포위했습니다. 동군은 제주성 남동쪽 ‘황새왓’(황사평)에 진을 치고, 이재수를 장두로 세운 서군은 제주성 서쪽 ‘먹돌생이’(용담2동) 근처에 진을 치게 됩니다. 그 이후부터 이곳은 이재수의 서군이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진터왓’이라 부릅니다. 제주민중사에서 ‘진터왓’이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에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됩니다. 1941년 일제는 현 제주공항 자리인 정드르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하게 됩니다. 정드르비행장 건설로 인하여 비행장 부지 안에 자리했던 두 마을, ‘몰래물’과 ‘정드르’는 강제 철거 당하게 됩니다, ‘몰래물’은 옆 마을 ‘흘케’에 자리 잡았고, ‘정드르’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진터왓’입니다.

1941년, 정드르비행장 건설로 ‘몰래물’ 마을은 ‘흘케’로, ‘정드르’ 마을은 ‘진터왓’으로 이주하게 됩니다.(표시: 고승욱)
1941년, 정드르비행장 건설로 ‘몰래물’ 마을은 ‘흘케’로, ‘정드르’ 마을은 ‘진터왓’으로 이주하게 됩니다.(표시: 고승욱)

‘진터왓’에 정착한 정드르 주민들은 용흥기운(龍興氣運)을 이어받아 ‘새정드르’의 설촌 의지를 다졌고, 해방 후에 마을 이름을 ‘흥운동’(興運洞)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용흥기운’을 어디서 누구로부터 이어받았는지에 대한 기원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추정하자면 ‘진터왓’ 인근 명소인 ‘용연’(龍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니면 20대 때 이재수의 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가 ‘흥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들 흉중에 품은 이가 이재수였다고 상상할 수도 있습니다.     

신축민란의 주역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을 ‘삼의사’(三義士)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삼인 중 유독 이제수만이 전설과 본풀이로 그 영웅담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제주민중은 관노(官奴)에 불과했던 이재수가 이끈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영웅담에서 계급적 동질성과 용흥기운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2021년,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가 서귀포시 대정읍 삼의사비 앞에서 출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사진=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2021년, 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가 서귀포시 대정읍 삼의사비 앞에서 출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사진=신축항쟁 120주년 기념사업회 제공)

하지만 이재수의 칼에는 너무 많은 피가 묻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희생의 크기로부터 조선왕조 500년 동안 누적된 제주민중의 한의 깊이를 가늠해 보려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재수가 제주민중의 깊은 한을 풀었다 하여 천주교인 300명 희생이라는 과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이재수의 난 100주년이 되던 2001년, ‘신축항쟁’이라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신축교안’이라 주장하는 천주교인이 모여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발표하였고, 120주년을 맞이해서는 신축년에 희생된 천주교인이 묻혀있는 황사평에 ‘화해의 탑’이 세워졌습니다. 이렇듯 ‘항쟁과 순교’의 대립을 넘어 상호이해와 신뢰를 위한 노력이 계속될 때 ‘진터왓 용흥기운’의 도래는 앞당겨질 것입니다.

2. 오리정

춘향가에 ‘오리정 이별’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춘향이 ‘오리정’五里亭에서 이도령과의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하는 대목입니다. ‘오리정’은 조선시대, 각 고을 관아로부터 오리五里 밖에 세운 정자로서, 관아에서 빈객을 맞이하고 보낼 때 예禮를 나누던 곳이었습니다. 영조 11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노봉 김정은 ‘제주에 오리정이 없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에 따르자면 제주의 오리정은 김정 목사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별도봉' 인근에 ‘오리정’이 생긴 이후, 제주 ‘화북포구’에 도착한 조선 관리들은 ‘오리정’에서 도영절차를 거친 후 관덕정으로 입성하였습니다. 그 당시 오리五里는 고을 안과 밖의 경계이며 예법禮法의 경계였던 것입니다.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제주 굿은 복잡하고 다양하여 삼읍三邑의 굿이 다르고, 삼읍의 심방(무당)이 다릅니다. 삼읍 심방들에게 붙여진 별칭에서 각 고을 심방들의 개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관 심방’(제주목)은 가무歌舞가 능하다 하여 ‘허우당 심방’, ‘대정 심방’은 본풀이의 내용을 정확히 따진다 하여 ‘본풀이 심방’, ‘정읍 심방’은 신에 대한 정성이 극진하다 하여 ‘오리정 심방’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오리정’은 ‘오리정 신청궤’에서 온 말입니다. ‘오리정 신청궤’는 심방이 신을 영접하는 재차祭次로서, 심방이 마을 밖 ‘오리정’까지 나가서 신을 영접하여 제장祭場까지 모셔오는 제의를 말합니다.

매년 입춘을 기해 열리고 있는 ‘제주 입춘굿’은 과거의 전통에 따라 지금도 관덕정에서 연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입춘굿’의 모든 의례는 관덕정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과거 ‘입춘굿’은 관덕정 오리五里 밖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정읍 심방은 동쪽 ‘별도봉’, 대정 심방은 서쪽 ‘정드르’, 모관 심방은 남쪽 ‘박성내’ 세 곳에서 동시에 ‘오리정 신청궤’를 올려 일만팔천 신을 청하여 모신 후, 신을 대동한 ‘걸궁’(거리 굿)이 관덕정을 향하여 연행되었습니다. 세 곳의 걸궁패가 관덕정에 모이면 그때 비로소 입춘굿의 신인동락神人同樂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주 굿의 세계에서 오리五里는 신과 인간의 환대가 이루어지던 신과 인간의 경계였습니다.

입춘굿. (사진=제주민예총 제공)
입춘굿. (사진=제주민예총 제공)

4.3 당시 희생자 수는 최소 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학살은 제주 전역에서 자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제주시내 권역 내의 학살, ‘별도봉’, ‘정드르’, ‘박성내’의 학살입니다. 관덕정을 중심으로 반지름 오리五里(약 2.5km)의 원을 그리면 동쪽에 ‘별도봉’, 서쪽에 ‘정드르’, 남쪽에 ‘박성내’가 있습니다. ‘박성내’ 근처 오리정의 소재는 확실치 않으나 ‘별도봉’과 ‘정드르’ 인근에는 ‘오리정’이라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4.3 당시 제주시내 권역에서의 학살은 관덕정에서 오리五里 밖, 오리정 인근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4.3 당시 관덕정에서 약 1km 거리에 위치한 제주농업학교에 100여 명의 청년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관덕정 남쪽 오리五里 밖에 위치한 ‘박성내’까지 끌려가서 학살당했습니다. 제주도의 최대 수감시설이었던 ‘주정공장’ 또한 관덕정에서 1km 거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정공장에 수감되어 있던 3,000여 명의 연행자 중 일부는 육지의 수용시설로 옮겨졌고, 일부는 제주에서 학살되었습니다. 하지만 학살터는 주정공장이 아니었습니다. 수감자를 배에 태운 후 바다 한가운데까지 가서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수중학살이 행해졌습니다. 수감자들이 학살된 바다가 관덕정 북쪽이니 이 또한 관덕정에서 오리五里 밖의 학살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빨간 점선은 제주성에서 오리五里(약 2.5km)의 반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제주시내권역 학살터(빨간 원)는 모두 관덕정에서 오리 밖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주시내권역 주요 수감 시설이었던 ‘제주농업학교’와 ‘주정공장’은 오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학살은 오리밖에서 자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분홍 원은 제주의 옛 마을을, 검은 원은 ‘잃어버린 마을’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림: 고승욱)
빨간 점선은 제주성에서 오리五里(약 2.5km)의 반경을 표시한 것입니다. 제주시내권역 학살터(빨간 원)는 모두 관덕정에서 오리 밖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제주시내권역 주요 수감 시설이었던 ‘제주농업학교’와 ‘주정공장’은 오리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학살은 오리밖에서 자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분홍 원은 제주의 옛 마을을, 검은 원은 ‘잃어버린 마을’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림: 고승욱)

관덕정 동쪽 별도봉 오리정 인근에서의 학살은 수십 명 단위지만, 서쪽 정드르 오리정 인근에서는 백명 단위의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정드르 오리정을 포함한 제주공항은 4.3 최대의 학살터입니다. 4.3 당시, 제주공항 북쪽에서 500~8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공항 동쪽 ‘소나무밧’, 공항 서쪽 ‘동박곶홈’, 공항 남쪽 ‘도령모루’까지 합치면 제주공항 인근에서 학살된 인명은 1,000명이 훌쩍 넘습니다.

4.3의 학살로 인해 오리정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예법이 무너지고,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이를 지켜봐야 했던 일만팔천의 신은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떠나간 신들을 다시 영접하기 위해 불러야 할 노래를 우리는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3. 몰래물

죽은 사람을 관에서 꺼내어 두 번 죽이는 것을 부관참시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주에는 부관참시를 넘어 세 번의 죽음을 맞이한 마을이 있습니다. 현, 제주공항 부지 안에 자리했던 ‘몰래물’(사수동)은 3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몰래물’은 세 번의 건설, 1941년 정드르비행장 건설, 1980년 제주공항 확장, 1987년 하수종말처리장 건설로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가)는 1940년대 ‘몰래물’ 지도이고, (나)는 ‘몰래물’이 ‘흘케’로 이주하여 자리잡은 ‘새몰래물’ 지도입니다. 제주공항 활주로가 ‘몰래물’을 가로지르고 있고, 하수종말처리장이 ‘새몰래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몰래물’ 주민 중 일부는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이주했고, 장년이 되어서 자식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자기 생애에 두 번이나 집을 빼앗긴 것입니다. ‘몰래물’ 마을 전체로는 조부모, 부모, 자식 삼대(三代)에 걸쳐 철거민이 된 셈입니다. (그림: 고승욱)
(가)는 1940년대 ‘몰래물’ 지도이고, (나)는 ‘몰래물’이 ‘흘케’로 이주하여 자리잡은 ‘새몰래물’ 지도입니다. 제주공항 활주로가 ‘몰래물’을 가로지르고 있고, 하수종말처리장이 ‘새몰래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몰래물’ 주민 중 일부는 어릴 때 부모와 함께 이주했고, 장년이 되어서 자식과 함께 이주했습니다. 자기 생애에 두 번이나 집을 빼앗긴 것입니다. ‘몰래물’ 마을 전체로는 조부모, 부모, 자식 삼대(三代)에 걸쳐 철거민이 된 셈입니다. (그림: 고승욱)

이 중 두 번은 일본에 의한 피해가 반복됩니다. 첫째는 1941년, 일제의 정드르비행장 건설에 의한 피해이고, 두 번째는 80년대, 일본 관광객에 의한 피해입니다. 제주도의 야심 찬 계획, 신제주 개발은 1970년대에 시작합니다. 신제주로 낙점된 ‘연동’은 개발과 함께 급성장하게 됩니다. ‘연동’이 유흥과 환락의 대명사가 된 것은 80년 전후입니다. 그 당시 물밀듯 들어온 일본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관광 마지막 날 이들은 ‘연동’에서 비싼 엔화도 뿌렸고, 비싼 똥도 뿌리며 밤새껏 유흥을 즐겼습니다.

비싼 돈의 혜택은 제주 사람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갔지만, 비싼 똥의 고통은 ‘몰래물’ 사람들만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이 싼 똥은 ‘흘천’으로 쏟아졌고, 바다와 만나는 ‘흘케’로 흘러내렸습니다. ‘흘케’는 정드르비행장 건설로 쫒겨난 ‘몰래물’ 사람들이 이주하여 ‘새몰래물’(신사수동)이라는 이름으로 새터전을 마련한 곳입니다. ‘흘케’로 흘러내린 똥으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물이었습니다. ‘흘케’ 주변 암반이 단단하여 수도가설이 어려웠고, 이에 따라 ‘흘케’로 이주해 온 ‘새몰래물’ 사람들 중 일부는 용천수에 뜬 똥을 걷어내며 물을 길러야 했다고 합니다. 또한 ‘흘케’에서 물질을 했던 구순의 할머니는 지금도 참외와 수박을 먹지 못합니다. 똥과 함께 쏟아진 참외씨와 수박씨를 헤치며 물질을 해야 했던 50년 전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흘천’에 흐르는 물은 신제주를 가로질러 ‘새몰래물’(흘케)로 빠져나갑니다.(그림: 고승욱)
‘흘천’에 흐르는 물은 신제주를 가로질러 ‘새몰래물’(흘케)로 빠져나갑니다.(그림: 고승욱)

제주도민이 제주공항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몰래물’ 사람들은 세 번의 철거와 똥의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1980년 제주공항 확장과 1987년 하수종말 처리장 건설로 철거된 ‘몰래물’은 공중분해 되어 네 개의 마을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중 비행장 인근, ‘연동’ 끝자락으로 이주하여 설립한 마을이 ‘제성마을’입니다. 하지만 돌투성이 맨땅에 마을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푼돈에 불과한 보상비로는 새집을 짖는 데에도 벅찼습니다. 마을 기반 시설이 전무했기에 도로, 상수도, 하수도를 삽과 곡괭이로 직접 파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마을에서 500m 떨어진 상수도원과 파이프를 연결하기 위해 가구당 30m씩 땅을 파야했고, 하수도를 연결하기 위해 2m 깊이의 땅을 파고 시멘트를 발라 하수관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몰래물 사람들을 쫓아낸 제주도와 대한민국은 아무런 지원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몰래물 16가구는 ‘제성마을’을 만들고, 마을 설촌을 기념하여 열두 그루의 왕벚나무를 심었습니다.

도로 확장으로 인해 베어진 제주시 연동 제성마을 입구 벚나무. (사진=조수진 기자)
도로 확장으로 인해 베어진 제주시 연동 제성마을 입구 벚나무. (사진=조수진 기자)

작년 4월, 제성마을 왕벚나무 무단벌목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제주시청이 도로확장을 명분으로 제성마을 왕벚나무를 무단벌목 한 것입니다. 제성마을 할머니들은 재산권 행사 제한과 비행기 소음 피해에도 그동안 묵묵히 견뎌왔지만, 왕벚나무를 벌목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몰래물 80년과 제성마을 40년의 기억을 함께 한 왕벚나무였기 때문입니다. 제성마을 할머니들은 시청 앞에서 왕벚나무를 살려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할머니들의 사정을 전해들은 제주도민들도 달려와 시청 앞에서 한 달 간 집회를 이어가며 제주시장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마침내 제주시는 사과의 공문과 함께 보상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렇게 집회는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올해 시장이 바뀌면서 보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4월, 하나 남은 왕벚나무 그루터기가 강제 이식되고 말았습니다. 작년 도로 확장으로 12그루의 왕벚나무가 사라졌지만, 그중 인도에 있었던 왕벚나무 하나가 용케 살아남은 것입니다. 비록 몸통이 잘려 나가 그루터기 신세가 되었지만, 그루터기는 가지를 뻗고 새싹을 틔워 상심한 제성할머니들을 위로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그루터기를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고, 제주시는 보존을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제주시는 곧게 뻗은 인도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 남은 그루터기마저 뿌리를 잘라내고 만 것입니다. 세 번이나 철거당한 몰래물 사람의 운명과 왕벚나무 그루터기의 운명이 어찌 이리 똑같을까요.

 잘려나간 벚나무에서 잔가지들을 화분에 심은 제성마을 주민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잘려나간 벚나무에서 잔가지들을 화분에 심은 제성마을 주민들. (사진=낭싱그레가게2 제공)

 

2022년 봄, 공항 건설로 길이 끊어진 몰래물의 옛 길목에서 ‘몰래물 혼디 거념길’ 행사가 열렸습니다. 제성할머니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제주시민들은 ‘몰래물’ 옛터를 순례하고, 제주도정의 무분별한 개발을 규탄하고, 제주의 미래를 걱정하였습니다. (사진제공: 낭싱그레가게2)
2022년 봄, 공항 건설로 길이 끊어진 몰래물의 옛 길목에서 ‘몰래물 혼디 거념길’ 행사가 열렸습니다. 제성할머니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제주시민들은 ‘몰래물’ 옛터를 순례하고, 제주도정의 무분별한 개발을 규탄하고, 제주의 미래를 걱정하였습니다. (사진제공: 낭싱그레가게2)

16가구에서 시작한 제성마을은 이제 100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 됐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왕벚나무에 대해 잘 모르거나 무관심하거나 바쁜 사람들입니다. 제성마을 왕벚나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할머니들은 이제 일곱 분 남았습니다. 그 할머니들만이 왕벚나무의 죽음을 슬퍼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변방 한반도에 분단이 있고, 한반도의 변방 제주에 4.3이 있고, 제주의 변방 몰래물에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슬픔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세계의 변방 한국에 통일의 열망이 있었고, 한국의 변방 제주에 통일의 투쟁이 있었고, 제주의 변방 몰래물에 할머니들의 굽히지 않는 저항과 도래한 용흥기운이 있습니다.   

너희들은 자르지만

우리들은 심는다

이슬처럼 작은 우리

폭포처럼 터진다

너희들은 잊었지만

우리들은 못잊어

꽃잎처럼 여린 우리

노을처럼 불탄다

“제성마을 왕벚나무 살려내라” 집회에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제성마을 왕벚나무 그루터기가 강제 이식되던 날, 시민단체 회원들은 그루터기의 나뭇가지를 잘라 꺾꽂이를 했습니다. 다행히 뿌리도 내리고 싹도 돋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좀 더 자라 튼튼해지면 제성마을 일곱 분 할머니들께 전해질 예정입니다. (사진제공: 낭싱그레가게)
제성마을 왕벚나무 그루터기가 강제 이식되던 날, 시민단체 회원들은 그루터기의 나뭇가지를 잘라 꺾꽂이를 했습니다. 다행히 뿌리도 내리고 싹도 돋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좀 더 자라 튼튼해지면 제성마을 일곱 분 할머니들께 전해질 예정입니다. (사진제공: 낭싱그레가게)

 

고승욱.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제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미술을 전공했다. 뜻한 바는 없었으나 솔잎을 먹다 보니 어느덧 미술에 업혀 살고 있다. 10년 전 고향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는 너무나 뜻이 많은 곳이었다. 뜻의 미로를 헤매다가 제주민속을 만나게 되었다. 미술과 제주민속의 연결 고리를 찾느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벌써 중년이다. 뒤늦은 이 고민이 뒤늦은 도둑질이 되기를... 업둥이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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