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 시인.
김경훈 시인.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이 지났다.

뉴스조차 보기 싫었던 지겨운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 속에 뉴스는 여러 국가적 재난과 위기상황의 대처에 미숙하고 국민의 뜻과는 정반대로 가는 그의 행태를 전했다.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졌다. 

친일 굴욕 외교에 철저한 친미 사대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는 짓마다 야만과 퇴행의 연속이다. 

난데 없는 공안 몰이와 노동자 탄압은 날로 더해 가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임기의 반도 채우기 전에 나라가 망하고 민생이 거덜나게 생겼다.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볼 것인가. 

요즘 뉴스를 보는 대신 다시 스테판 에셀의 책을 읽었다.

‘분노하라!’ 

이 말은 2차대전 당시 반나치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프랑스의 늙은 투사 스테판 에셀의 외침이다.

그가 말하는 분노는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악에 대해 맞서서 분노하고 참여하고 저항하고 평화적으로 봉기하라는 의미다.

다음은 그의 책의 일부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사람들이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없었다.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다. 레지스탕스에 동참한 형제자매들의 희생과 파시즘의 야만에 맞선 여러 나라들의 단결 덕분에 나치즘은 궤멸되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불의에 맞서는 우리의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 살아있다.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이며 ‘자유 프랑스’의 투쟁 동력이었던 우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호소한다.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그 이상理想들을 부디 되살려달라고. 전파하라고. 그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총대를 넘겨받으라. 분노하라!”고.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내가 나치즘에 분노했듯이 여러분이 뭔가에 분노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흐름에 합류하게 되며, 역사의 이 도도한 흐름은 우리들 각자의 노력에 힘입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이 분노의 최대의 적은 바로 무관심이라고 스테판 에셀은 지적하고 있다. 

그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라고 말하는 방관자적인 태도이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개인이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참된 세상을 뒤로 후퇴시키는 일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에서 이런 방관자적인 태도는 모든 침략과 압제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조차도 상실하게 됨을 우리는 무수히 보아왔다.

우리가 분노하고 참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존엄과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다. 

이 야만과 퇴행을 여기서 끝내자.

우리에겐 시퍼렇게 날 선 조선의 낫과 단단한 노동의 육중한 망치가 있지 않은가.

막강한 연대의 불타는 신기전이 있지 않은가.

이 더러운 야만과 역사의 퇴행을 여기서 야무지게 끊어내자.

이 추잡한 조작과 횡포한 탄압을 여기서 확실하게 끝장내자.

우리에겐 불의에 맞선 동학농민들의 결기의 죽창이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제주3.10 총파업의 당당한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거대한 웅혼의 해일이 있지 않은가.

저 흉포한 멧돼지와 간교한 하이에나 무리들에게 정의의 저주로 불가역적 철퇴를 내리치자.

저들에게 제주4.3의 극한 공포와 절망, 그 절벽의 나락을 그대로 돌려주자.

저들에게 일제 강제징용과 정신대, 그 피맺힌 울분을 그대로 돌려주자.

저들에게 조작범죄와 조작간첩, 그 피눈물과 억울한 옥살이를 그대로 돌려주자.

우리에겐 해방과 통일 그 절정의 전야가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우리 아이들의 희망찬 미래가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만인동락의 한판춤, 전인류적 평등의 환희 그 완전한 결실의 막중한 임무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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