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진동에 사시는 김씨 어르신도 찾아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이고. 니는 모르면 말도 마라. 그 집은 개가 하도 짖어서 들어가지도 못한다. 김씨는 우리양반 갑장이라 내가 챙겨보는데 요즘 얼굴도 못봤다. 니가 가도 절대 못본다.”

“형님. 근데 올해는 마을대청소 안하냐고 누가 물어보던데?”

“지난해 대청소한다고 방송을 그렇게 해도 나오지도 않는데... 이 무슨!”

“며칠전에 청년회가 마을길에 풀을 깎았는데, 풀을 깎았으면 훅 부는 걸로 치우면 되는데 저렇게 그냥 어지럽혀 놓고 갔다.”

벌써 2시간째다. 50대 막내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모인 첫 회의는 주제와 상관없이 이리 저리로 날아다닌다. 지켜보던 나와 사무장은 영혼까지 탈탈 털렸지만,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말들을 애써 꾹꾹 참아눌렀다. 짧은 기간이지만 마을 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절대로 어르신들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 안된다는 거다. 할 말을 다 하고 나서야 진짜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반드시 끊겼었던 그 화제로 다시 돌아온다.

 5월 17일 열린 마을봉사단 첫 회의는 길고 길었다.(사진=이상영 제공)
5월 17일 열린 마을봉사단 첫 회의는 길고 길었다.(사진=이상영 제공)

주민들에게 여러차례 마을문자를 발송했지만 5명의 ‘주민안부프로젝트’ 봉사단원을 모집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참여하실 만한 분들에게 개인적으로 따로 전화를 돌렸지만 다들 개인 사정이 녹녹치 않으시다.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던 주민 한 분도 갑자기 미국에 있는 자식네로 가셔서 연락두절! 감사하게도 이장의 읍소를 가엽게 여기신 어르신들이 자원해 주셔서 어렵사리 봉사단을 구성하고, 5월 중순 첫 회의를 열 수 있었다.

샛길로 빠졌다 다시 돌아오길 반복하는 기나긴 논의 끝에 봉사단장을 뽑고, 10가구 정도의 지원 대상을 임시로 선정했다. 한 달에 4번 화요일마다 가정을 방문해 안부를 묻고, 그 중에 2번은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기로 결정했다. 6월 7일자로 봉사 시작일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단톡방을 만들자고 하고 나서야 마을총회보다 더 기빨리는 회의는 끝이 났다. 불면증이 무색하게 나는 저녁을 먹은 후 바로 죽은 듯이 잠들었다.

“음식 담을 용기는 투명한 유리용기로 주문할게요.”

“어르신들은 손에 힘이 없어서 깨질 수도 있으니까 플라스틱이 좋을건데.”

“힘드시니 다음부터 장은 제가 알아서 봐올게요.”

“동생, 그건 아니지. 장 볼 때는 같이 가야지.”

6월 7일, 이색교류센터에서 모인 2차 회의. 음식 담을 용기 재질과 장보기 이야기가 오갔다. 이날은 마을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우리마을로고가 새겨진 파란색 단체복을 전달해드린 후 나와 사무장은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고백하건데 단체복 색깔은 내 맘대로 골랐다. 이것마저 회의 주제로 올렸다간 오늘 안에 끝나지 않겠지 싶어서다.

회의가 끝나고 봉사단은 지난번 임시로 선정했던 대상가구를 직접 방문해 그분들의 의사를 일일이 확인했다. 한 시간쯤 후 봉사팀 단톡방에는 다음 주에 만들 음식 메뉴와 시장 볼 재료들이 선정되었고, 곧이어 가정방문 후기와 사진들도 올라왔다. 다행히 조금씩 틀이 잡혀가고 있는 모양새다.

“시장보실 때는 이 보조금 카드로만 딱 30만원만 써야 해요. 1원이라도 더 쓰시면 안돼요.”

“에이, 뭐가 이리 복잡하노?”

“보조금이라 안 그러면 서류처리가 너무 힘들어져요.”

‘주민안부프로젝트’는 거문오름탐방안내소 안에 마을회가 운영하는 오름보러가게에서 발생한 수익금 500만원과 소규모 공익활동을 위해 제주도가 지원한 900만원의 보조금을 활용해 마을에서 처음 진행되는 취약계층 어르신 돌봄 사업이다. 다행히 마을 자체 예산이 있어 보조금으로 집행하기 힘든 부분을 처리할 수 있게 되어 활동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인터넷으로 처리되는 복잡한 보조금 서류처리 과정은 참 힘들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류처리를 담당하는 사무장이 장보기에 직접 동행해 보조금 카드 사용 방법 등에 대해 자세한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서류 처리와 같은 복잡한 일들은 어려워하시지만, 어르신들이 직접 참여하는 봉사단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더 큰 장점이 있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같이 살 부대끼고 살았던 친구가 직접 방문해 이야기도 들어주고 음식을 나눠주니 대상 어르신들도 더 쉽게 마음을 여신다. 이미 서로의 성격에서부터 가정사까지 잘 알고 있으니 건강 이야기부터 자식들 이야기까지도 못 할 이야기가 없다. 안면이 없는 젊은 봉사자라면 쉽지 않을 일이다.

6월 13일 오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복지회관에 모인 봉사단원들(사진=이상영 제공)
6월 13일 오후 음식을 만들기 위해 복지회관에 모인 봉사단원들(사진=이상영 제공)

6월 13일 오후, 복지회관에 봉사단이 다시 모였다.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는 날이다. 오랜만에 잔치가 열린 듯 마을부엌에서 맛있는 음식 냄새가 흘러넘친다. 오늘 메뉴는 소고기미역국, 무생채, 두부조림, 멸치볶음이다. 큰 솥에 불린 미역과 참기름을 넣고 달달 볶은 후 소고기도 듬뿍 넣어준다.

프라이팬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서 구운 두부가 노릇노릇하다. 큰 양푼에는 단정하게 썬 무우채가 한라산만큼 수북이 담겨있다. 오랜 요리 경력만큼 긴 격론이 오간 끝에 완성된 정성스런 음식들과 함께 후식용 수박도 먹기 좋게 잘라 밀폐용기에 담았다. 마무리 설거지까지 끝내는 데 소요된 시간은 겨우 2시간! 달리 고수가 아니다. 파란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담긴 음식들은 곧바로 봉사자들에 의해 11가구 어르신들께 배달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왜 마을봉사단 일을 부녀회나 자생단체에 맡기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대충 얼버무렸지만 사실 요즘 대부분의 마을들이 직면한 속사정들이 있다.

얼마전 주변 마을 전직 이장님 몇 분과 저녁식사를 함께 할 자리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장과 마을일이 대화 주제가 되었다. 요새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 청년회나 부녀회 등 마을자생단체에 뭔가를 부탁하기가 갈수록 부담스럽다고 한목소리로 토로하셨다. 어르신 식사 대접하기나 마을길 예초와 같이 힘이 들고 돈(?)이 안되는 일들을 마을 자생단체들이 꺼리고, 매번 이런 볼멘소리를 듣기 미안해 외부 업체에 일을 맡겼다는 경험담이 오갔다.

물론 자생단체들이 처한 버거운 입장 역시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을일이라는 게 누군가에겐 ‘자원봉사’로 보이고, 누군가에겐 ‘노동착취’로도 보이는 일들이 태반이니까. 이번 ‘주민안부프로젝트’를 위해 새롭게 마을봉사단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 딜레마의 연장선이라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을 수밖에.

 

인스타그램의 소식글을 보시고 귤즙을 후원해 주신 감귤농원 부부님(사진=이상영 제공)
인스타그램의 소식글을 보시고 귤즙을 후원해 주신 감귤농원 부부님(사진=이상영 제공)

며칠 전 마을봉사단의 탄생과 첫 활동 소식을 마을가게 인스타그램에 올렸더니 가게에 무농약감귤즙을 공급해 주시는 이웃 마을 농부님께서 곧장 연락을 주셨다. ‘언제나 응원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마을 어르신들께 전해드리라며 맛있는 감귤즙을 리사무소로 직접 배달해 주셨다. 우당탕탕 두서없고 소박한 출발이지만 이렇게 봉사단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시는 분들까지 생겼으니 어찌 힘이 나지 않으리오!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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