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흘2리에는 주인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정원이 많다(사진=이상영 제공)
선흘2리에는 주인장의 개성이 드러나는 정원이 많다(사진=이상영 제공)

올해 초 선흘2리 마을총회에서는 정원축제 예산이 통과되었다. 총회결과에 따라 10월 마을 정원축제를 앞두고 실무를 책임지는 8명의 주민으로 구성된 준비팀이 꾸려졌다. 일주일에 두 번 밤늦은 시간까지 치열한 회의를 진행했다. 작은 마을에서 처음 시도하는 행사이기에 마땅히 참고될 만한 사례도 별로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준비팀이 고생을 많이 했다.

축제의 주제는 ‘정원’이다. 누구의 집에나 마당과 정원이 있는 한라산 중산간의 우리 작은 마을에서는 골목길을 따라 산책하는 여행자들이 돌담너머 주인들이 가꾼 정원을 보고 이내 발걸음을 멈춰 사진을 찍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선흘2리 주민들은 왜 정원과 마당에 진심일까? 아마도 ‘이주민의 마을’라는 정체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마을 주민들은 집을 짓기 위해 작은 땅을 사서 내려온 분들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경작하거나 꾸밀 수 있는 공간은 그저 집을 짓고 남은 땅덩이 뿐이다. 도시를 떠나 자연과 농촌 생활이 좋아서 이주한 사람들에겐 이 작은 공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러니 더욱 살뜰하게 꾸밀 수밖에. 누군가는 그곳에 우영팟을 일구어 철마다 먹거리를 자급하고, 누군가는 예쁜 꽃과 나무로 꾸미기도 한다.

특히 코로나 대유행으로 인한 오랜 격리기간에 마을 주민들은 정원 꾸미기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역병으로 사람들과 대면하기 힘든 시기에 우리들은 정원에 자리를 깔고 식물들과 대화하며 그 곳을 자신만의 작은 숲으로 만들어갔다. 이 예쁜 숲을 혼자 보기엔 정말 아까웠다. 단 하루라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뭐 없을까?

마을 정원축제 준비는 올해 초부터 바지런히 시작했다. 박선영 정원디자이너를 섭외해 3월부터 ‘마을정원사 되기 수업’을 진행했고, 9월까지 8차례의 이론과 실습수업을 병행했다. 수업은 시작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좁은 공간에 30명이 넘는 주민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업을 받았다. 현장학습에는 45인승 버스가 모자랄 정도였으니 정원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관심과 사랑은 실로 대단했다. 마지막 실습에는 수강생들이 직접 그간 배운 지식들을 활용해 보건진료소 뒷편에 방치되었던 마을 공간을 정원으로 가꾸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땀을 흘리며 굵은 가지들을 전정하고, 주변 환경에 맞는 꽃을 심고, 소나무껍질인 ‘바크’로 멀칭작업까지 하고 나니 버려진 공간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선흘2리 마을정원사 1기는 탄생되었다. 마을정원사를 길러내는 과정도 우리에게는 축제였다.

올해 5월부터 9월까지 8차례 진행 마을정원사 되기 수업(사진=이상영 제공)
올해 5월부터 9월까지 8차례 진행 마을정원사 되기 수업(사진=이상영 제공)

요즘 정원은 소위 좀 ‘핫’한 아이템이다. 유명한 ‘순천만국가정원박람회’도 있고, 서울에서도 대규모 정원축제가 열린다. 이런 행사들은 지자체들이 큰 돈을 들여 대규모도 진행하기에, 실제로 지역주민들이 주체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마을 축제는 다르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스스로 준비했다. 게다가 우리들이 직접 가꾼 지극히 사적인 개인 정원까지 기꺼이 낯선 이들에게 개방한다.

코르도바 파티오 축제에서(사진=김남희 제공)
스페인 코르도바 파티오축제. 집집마다 화사하게 꾸려진 정원과 화단을 만날 수 있다.(사진=김남희 제공)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원축제를 상상하게 된 건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우리나라에 알린 뚜벅이 여행자 김남희 작가가 게시한 SNS 사진을 보고나서다. (사실 난 ‘김남희 여행학교’ 1기 수료자이자, 영광스런 1호 신청자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2년 김남희 작가가 스페인 코르도바를 여행하며 찍은 ‘파티오축제’ 사진을 보고서는 행복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1918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시작된 이 축제는 2021년에 무려 100주년을 맞이했단다. 집집마다 시민들이 손수 꾸민 정원과 화려한 꽃들, 그리고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 ‘우리 마을에서도 이런 축제가 열린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안될 게 뭐있어?’ 이런 상상을 이웃들과 나누었다. 말은 힘이 세다. 자꾸 말하다 보면 결국 이루어진다.

흥겨운 거문오름풍물단의 길놀이로 시작된 정원축제(사진=이상영 제공)
흥겨운 거문오름풍물단의 길놀이로 시작된 정원축제(사진=이상영 제공)

10월 7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오름진선흘2리 정원축제’는 나름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귀빈소개나 축사 따윈 과감히 빼버리고, 축제는 거문오름풍물단의 흥겨운 길놀이로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방문객들은 부스에서 나누어준 ‘정원 산책 지도’를 들고 7곳의 개방된 정원을 편안하게 둘러보며 튤립화분만들기, 감물염색, 귤청만들기, 호두나무젓가락만들기 등 여러 체험들도 자유롭게 즐겼다.

축제본부가 있는 이색교류센터 앞마당에서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봉사로 꽃모종판매, 먹거리와 핸드드립커피, 반려견 봉사 부스를 운영했다. 1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장대비가 내리는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주민들이 준비한 공연을 즐겼다. 작은 마을 축제에 기꺼이 응해주신 초대가수 장필순 씨의 아름다운 노래로 축제는 행복하게 마무리 되었다.

감물과 쪽으로 염색한 천연 염색 손수건 만들기 체험(사진=이상영 제공)
감물과 쪽으로 염색한 천연 염색 손수건 만들기 체험(사진=이상영 제공)

축제가 끝난 뒤 예쁜 정원을 기꺼이 개방해 주신 분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개인 공간을 낯선 이들에게 선뜻 연다는 것이 쉬운 결정이 아닐텐데 마음 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다. 공간을 오픈한다고 해서 이분들에게 득이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주인들은 손님들이 찾아온다는 부담감에 힘을 들여 잔디를 깎고, 풀을 뽑고, 자기 돈 들여 산책길을 만들고, 꽃들도 심으셨다. 그럼에도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어 좋았다’고 말씀해 주시니 더 고맙다. 마을회에서 드린 약소한 정원관리비마저도 다시 마을회에 기부해 주신 분도 계시다.

 ‘환대하는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반 일리치는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어떤 문화든지 교환될 수 없는 사용가치가 반드시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으며 이런 사회에서는 자신의 것을 보상없이 내어주는 사람도 대가 없이 그걸 받는 사람도 모두 행복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경제적 합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쓸모없는 즐거움에 관한 상상’이 문화와 축제의 원동력이지 않을까? 돈줄을 거머쥔 행정이 요구하는 관광객수와 경제적 이익만이 우선시되는 관행적인 지역축제는 과연 누구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우리마을은 내년에도 정원축제를 진행한다. 올해 시작한 작지만 행복했던 마을 축제가 ‘쓸모없음’과 ‘환대의 즐거움’이 충만한 행사로 100년 뒤에도 살아 남아있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함께 해 주신 준비팀과 참여해 주신 선흘2리 주민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이상영 선흘2리장(사진=김재훈 기자)

선흘2리 마을회장 이상영 씨는 '20년간 학교에서 지리와 사회를 가르치다 제주로 이주한 지 3년째인 초보 제주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2년 전에 참여한 마을총회에서 제주동물테마파크 반대대책위원이 된 후, 최근 이장으로 선출·임명되었다. 1973년생인 이상영 이장의 고군분투 마을공동체회복기를 매달 1회 게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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