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는 감태와 구제기(뿔소라)가 제대로 대접을 못받았다. 그러다 해녀들 수입원이 된 것이 일제강점기. 감태와 구제기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군수물자였다. 이를 채취 해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해녀들은 그 돈을 어디다 썼을까. 1915년에 태어나 평생 물질만 하던 이두화 해녀의 집은 4·3 당시 왜 쑥대밭이 됐을까. 

28일 오전 10시 제주시 구좌읍 소재 하도어촌체험마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서민생활사를 연구하는 고광민 선생에게 '감태와 구제기를 통해 본 제주 생활사'를 듣기 위해서다. 

'제주해양포럼 2023' 네 번째 순서로 마련된 '감태와 구제기를 통해 본 제주 생활사'는 제주투데이와 녹색연합이 공동 주최했다. 

토끼섬과 허물어진 난도리 (사진=조수진 기자)
토끼섬과 허물어진 난도리 (사진=조수진 기자)

하도 어촌마을체험장을 오른쪽에 두고 서면 '난도리여'가 보인다.

난도리여는 '토끼섬'의 옛 이름이다. 섬과 원담(석방렴) 사이에 놓인 돌다리가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난도리'라 불리는 '그것'은 사람 다니던 길이 아니라고 한다. 밀물에 들어온 멜(멸치의 제주어)을 원담에 가두기 위해 고안한 하도리 주민들의 지혜.

고광민 선생은 "국가는 '국방유적'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본다. '난도리'는 제주생활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 세계적 유산인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고 선생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난도리여(토끼섬)'가 보이는 정좌에 앉았다. 오밀조밀 모인 이들에게 고 선생은 제주 바다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용비어천가 2장' 일부를 먼저 읆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름에 아니 뮐세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고광민 서민생활사 연구자에게 '감태와 구제기를 통해 본 제주 생활사'를 듣고 있는 사람들. (사진=박소희 기자)
고광민 서민생활사 연구자에게 '감태와 구제기를 통해 본 제주 생활사'를 듣고 있는 사람들. (사진=박소희 기자)

제주 바다는 크게 '갯곳' '걸바다' '펄바다'로 나뉜다. 

갯곳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인 갯가를 말한다. 걸바다는 갯곳을 지나 바닥이 화산암으로 이뤄진 바다다. 이곳에는 조선사람 절반을 먹였다는 미역과 문제(?)의 감태 등 바다풀이 해중림을 이루는 곳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걸바다는 바다 거목(뿌리 깊은 해조류)들의 보고였다. 펄바다는 개펄이 깔린 바다를 일컫는다. 

걸바다 해중림은 구제기들이 식량을 마련하는 밭이다. 구제기들은 걸바다 바위 속이나 바위틈에 살면서 미역이나 감태 등을 먹고 산다. 

제주도 해녀들은 원래 감태와 구제기를 채취하지 않았다. 미역이나 전복처럼 진상품목도 아니었으며, 전통적인 식문화 대상에 끼어들지 못해서다. 

본격적으로 감태를 채취하기 시작한 것이 일제강점기. 제주 해녀 역사 상 처음으로 현금을 주머니에 넣어준 것이 감태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태평양 전쟁 덕분에 가난했던 제주 해녀들은 호황기를 맞았다. 요오드 성분이 많은 감태가 화약 원료로 적합해서다. 

감태를 먹고 있는 구제기 (사진=녹색연합)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해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화약의 원료인 감태 증산을 적극 장려한다. 일본 국방성은 유럽과의 교역로가 차단되자 1905년 성산포 오조리에 감태 공장(한국물산회사)를 지었다. 

일본이 필요한 요오드화칼륨은 1년에 6~7만 파운드(2만7180~3만1710㎏). 이중 ⅕에 해당하는 1만파운드(4530㎏)를 제주에서 확보했다고 한다. 

제주 해녀들은 약 4m에서 10m까지 물속에 들어가 감태를 딴다. 우량 감태는 수심 12∼13m까지 들어가야 한다. 기량이 좋은 제주 해녀들이 감태 채취에 선봉에 나섰다. 이들은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러시아, 중국까지 진출했다.

일본은 '가격 후려치기'로 제주 해녀들을 착취했지만, 해녀 입장에서는 비료로나 쓰던 감태의 판로가 열렸으니 형편이 좋아진 셈이다. 

물질 나가는 해녀들 (제주투데이 DB)
물질 나가는 해녀들 (제주투데이 DB)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감태 시세는 점점 상승해 반출액이 십수만원을 웃돌았다고 한다. 당시 기와집이 200원 하던 시절이다. '미개의 보고 제주도(未開の寶庫 濟州島)(전라남도 제주도청, 1924년)'에 따르면 조·보리 풍작으로 차츰 경기가 좋아진 제주도는 1917년 초 감태 시세가 더욱 상승하며 호경기를 맞았다. 

구제기는 일본 먹거리 군수물자가 된 1930년 이후 채취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 전까지 제주 해녀는 구제기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감태물에(물질)'와 '구제기물에'로 큰 돈을 번 제주 해녀들은 자식 교육에 눈을 돌렸다. 좌익이냐 우익이냐, 그런 이념 따위가 중해서가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표지(標紙)'를 쓸 수 있는 자식이었다. 

부잣집에서 쌀이나 돈을 빌려 쓰면 보통 표지를 써야 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면 고소리 술 1병 값이었다. 표지는 차용증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난도리를 가리키며 안타까워하는 고광민 선생 (사진=조수진 기자)
난도리를 가리키며 안타까워하는 고광민 선생 (사진=조수진 기자)

"(그제껏) 가난했으니 집에 폐지 쓸 만한 놈(자식)이 있나. 제 집에 폐지를 쓸 줄 아는 놈이 생기면 걱정이 하나 줄어드니까 아주 영광스러운 자식을 두게 되는 거지. 돈이 생기자 네가 공부를 좀 해서 표지를 써라 그런 거야. 그런데 서울이나 일본으로 간 자식들이 사회주의 대학에 들어간거야. 뭐, 빨갱이가 되려고 들어갔겠어? 표지 배우라니까 경제학과에 간 거지."

해녀 자식들은 감태나 구제기 등으로 번 돈으로 육지부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이들은 사회주의 이론이 탄탄한 도쿄 와세다대학이나 교토 리츠메이칸대학에 주로 입학했다. 4·3항쟁의 주역 중 한 명인 이덕구 역시 리츠메이칸대학 출신이다. 

해방 이후 유학길에 올랐던 제주 해녀 자식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됨에 따라 제주도 건준 또한 같은해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고 선생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자(자치)"고 결성한 인민위원회가 교육사업에도 주력했다고 했다. 

해방 직후 제주도는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쏟았다. 1948년 4·3이 일어날 때까지 초등학교는 기존 51개에서 44개 늘어 95개가 됐다. 중학교는 기존 1개에서 10개를 더 만든다. 

유학을 마치고 온 제주 청년들은 학교 선생이 됐다. 4·3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도 교사 출신이다. 그 당시 학교 선생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고 한다. 

"선생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무보수 명예직이었을 때나 유효하지 지금은 아니"라는 고 선생.  

불타는 오라리마을. 미군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1948. 5. 1) 4.3진상조사보고서
불타는 오라리마을. 미군정찰기가 공중에서 촬영한 이 모습은 기록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온다(1948. 5. 1) 4.3진상조사보고서

제주도 역사가 피로 물든 건 해방 직후다.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한 '3.1사건'에 항의해 그해 3월10일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이로 인해 미군정은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낙인찍었고,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3·1발포사건과 4·3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4·3.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평생 바다만 알고 산 사람들조차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고 선생은 1915년 생 이두화 해녀의 삶을 들려주며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이두화는 4살 어린 고금석과 결혼했다. 그는 함경북도 청진까지 가서 감태를 채취했다. 이두화는 물질로 번 돈으로 남편은 서울 배제고등학교에, 시동생 고준석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유학을 보냈다. 

유학을 마친 남편은 부산에서 돈을 많이 벌지만 시동생은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고준석이 빨갱이가 됐으니 이승만 정부가 형인 고금석을 잡아들여 족친다고. 그 충격으로 죽어 버리니까 집이 막 쑥대밭이 된거지. 만약 감태가 없었다면, 구제기가 없었다면 그 집이 쑥대밭이 될 리가 없지. 이두화 집안만 그랬겠어? 이를 제주도 전역으로 확대해보자는 거야."

고 선생은 "광복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이어진 제주 인민 중심 사회 건설 실천은 좌절되고 말았다"면서 제주도 감태와 구제기가 "소위 제주도 젊은이들의 '빨갱이' 누명 씌우기에 한몫을 했던 셈"이라고 연결했다. 

제주도 현대사의 기구를 함께 한 구제기는 여전히 70∼80%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 일본 전통적인 식문화 대상으로 우뚝 서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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